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1. 두흐카 duhkha 苦


앞선 장(章)에서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큰 주제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깨달음은 불교 초기에는 붓다와 같이 세상을 부정하여 그것을 버리고 나가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을 부정하고 나가야 하느냐의 문제가 대두되는데, 힌두교에서는 우빠니샤드를 통해 우주의 본질과 개체 인간의 본질이 같음을, 만물은 모두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으니 그 본질을 깨달으라는 의미지요. 그러니 그 우빠니샤드가 중심이 된 힌두교에서는 그 시대의 최고의 사회 가치인 제사나 의례를 통해 물질적 복을 구하는 것은 너무 물질 편향이니, 숲으로 들어가 범아일여를 깨달아야 한다는 수행자들이 정신세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 힌두교는 기본적으로 세상은 가치가 있다는 사회 내에서 사는 사람들과 그 가치만으로는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정신적으로 영적 생활을 해야 한다는 두 가지가 공존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빠니샤드와 비슷한 궤적으로 깨달음을 중시하는 한 흐름이 있었으니, 세상에는 전혀 가치가 없으니, 세상을 완전히 버리고 나가서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사는 삶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라 설파하는 움직임이 생겼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붓다가 시작한 불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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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힌두교에서와 달리 세상은 전혀 가치가 없으니 오로지 두흐카 즉 고(苦)의 바다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 논리적 이유는 세상 모든 것은 다 변하니, 영원한 것이 없어서라고 했습니다. 우빠니샤드가 말하는 브라만-아뜨만이라는 영원히 변치 않는 본질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서 범아일여를 깨닫는다는 것은,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가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그 자리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기세자의 길을 간 것은 오로지 세상은 고통이라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 고통은, 널리 알려지다시피, 생-로-병-사를 피할 수 없어서라고 생각했지요. 모든 사람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결국 죽는 그래서 사랑은 결국 이별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고, 죽어서 또다시 다음 생에서 다른 존재로 태어나고, 또다시 살다가 또 죽고 이별하고 또 태어나고 ... 하는 윤회를 거듭해야 하는 것이, 곧 세상의 이치이니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붓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 세상이 고통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잘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여인이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결혼하여 아들도 낳고, 그 아들에게 모든 사랑을 주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아들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며 약을 구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안타까워 했지만, 결국 미친 것으로 여겨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노인이 그에게 붓다를 가서 만나보면, 아이를 살릴 수는 없지만, 길을 알려줄 것이라고, 일렀습니다. 그는 붓다를 찾아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붓다는 잠자코 듣더니, 세상에 가서 겨자씨를 그해 오시라, 단, 한 번도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집에서 구해오셔야 한다고 일렀습니다. 그는 마을로 가 만난 사람마다 그런 겨자씨가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부모, 자식, 배우자, 형제, 친구든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이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진리로, 자신만이 겪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이가 겪어야 하는 고통이라는 사실을요. 그 후, 그는 여성이지만,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어 비구니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붓다가 출가하여 여러 해 수행한 후 깨달은 게 있습니다. 초기 불교의 붓다 가르침 가운데 핵심 중의 핵심인데,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진리라는 것인데, 그 첫 번째가 모든 것이 고통(苦)이라는 사실의 진리이지요. 그다음으로, 그 고의 원인은 집착(集)이며 그것을 끊어 없애야(滅) 하니 오로지 제대로 된 길(道)을 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붓다가 그 생각의 출발을 세상이 고통임으로 삼은 것을, 그가 어느 날 성문 밖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의 고통에 괴로워하였고, 그래서 궁궐을 떠났다고 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소설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힌두교가 본질론을 앞세워 카스트 체계를 강화하고, 브라만 카스트들이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세상의 질서에 순종하여야 다음 세상에서 좋은 생으로 환생한다는 윤회론을 퍼뜨리고 사람들은 그에 순종하면서 물질을 빼앗기며 고통스럽게 살아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부유한 자들이 탐욕스러워 재산을 끝없이 그러모으면서 세상이 악이 되었다고 보았던 거지요. 브라만들이 대규모의 제사를 지낼 것을 강요하면서 그를 통해 많은 소를 축적하고, 좋은 의복, 집, 여자, 마차, 밭과 같은 사유 재산을 쌓기 시작했고, 원래는 검소한 제사가 갈수록 의례가 복잡하고, 규모가 커지면서 그들이 갈수록 탐욕스러워졌고, 그 속에서 제사에 순종해야 다음 생에 좋은 몽으로 윤회한다는 세계관이 생겼다고 본 겁니다. 붓다가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본 것은 바로, 이 제사를 통한 까르마(업)의 세계관이 지배적인 이세상에서 생로병사와 윤회를 피할 수가 없어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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