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2. 스깐다 Skandha 五蘊
10년 전쯤에 [붓다와 카메라]라는 책을 한 권 썼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의아해하더군요. 많은 사람이 어떻게 카메라와 붓다가 연결되는지 궁금하다고 했지요. 제가 그 둘의 관계를 이어서 생각하게 된 계기는 붓다가 생각한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개념과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성격이 너무나 흡사해서 둘을 비교해 본 겁니다. 사진은 이미지입니다. 필름을 장착한 기계가 빛을 이용해 그 앞에 존재하는 실체의 겉모습을 잡아내 만든 것이지요. 실재는 전혀 아니고, 그것을 이용하거나 보는 혹은 해석하는 사람에 의해 얼마든지 그 성격을 변화하여 사용될 수 있는 상(像)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도 사진을 본질이며 영원한 것이라 보지 않듯이, 붓다는 세상 존재 모든 것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물론 인간도 그 안에 포함되지요. 붓다가 세상 존재 특히 인간, 즉 ‘너’라는 당신을 그렇게 인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갖게 되는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지요.
앞에서 붓다가 세상을 버리고 떠나버린 것은 세상에 어떤 진리도 존재하지 않은, 모든 것이 변하는 고통의 바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무엇이 그토록 변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시죠. 어느 날 한 젊은 수행자가 붓다에게 묻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라고 물으니, 붓다가 그를 거울 앞에 데려가 되묻기를, 거울 속의 그대는 누구인가, 수행자는 답하기를 저의 얼굴과 몸이라고 답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일부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답하지요. 그러자 붓다가 이에 관해 설명합니다.
비슷한 내용으로 좀 더 직설적인 이야기도 한 번 들어보시죠. 붓다는 시체의 비유를 들어 ‘나’를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시체를 보았을 때 ‘이것이 나다’라고 말하겠는가, 라고 묻지요. 그러자 제자가 답하기를,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시체는 그저 몸이 남은 것이지, 생명이나 의식이 없으니까요, 라고 합니다. 그러자, 붓다가 가르치기를, 그래서 내가 말하니, 그대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이 몸도, 결국 그 시체와 다르지 않지요, 단지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다섯 가지 뭉텅이가 잠시 작용하는 것일 뿐이지요. 이내 사라지고 없습니다, 라며 모든 건 다 허탄한 것으로 사라지고, 영원한 것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부연하면, 자기라고 보이는 것은, 여러 스깐다skandha 즉 무더기가 모여 만들어진 겉모습인데, 임시 모습으로 환상일 뿐입니다. 그 스깐다는 다섯 가지인데, 첫째는 색(色), 즉 육신이고, 둘째는 수(受) 즉 감각이며, 셋째는 상(想), 기억과 인식이고, 넷째는 행(行), 의지와 습관 같은 행동이며, 마지막 다섯 번째 것은 식(識) 즉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의식이라고 가르치지요. 이 다섯 가지가 모였다 흩어지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당연히 그 다음 물음이 뒤따르겠지요. 수행자는 묻기를, 그러면 진짜 ‘나’는 어디 있습니까? 붓다가 어떻게 답했을까요? 단호하게 말하지요. 고정된 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모든 존재는 무상(無常)하며, 고정된 ‘나’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지요. 다섯 스깐다가 모여 형상을 이루고 그것은 변화하는 것이라는 건, 붓다가 발견한 것이 아니고 힌두교에서 이미 존재했던 세계관이니, 범인도적 개념이지요. 그런데 힌두교에서는 그 변화무쌍한 만물의 모습 뒤에 본질 즉 우주적 본질인 브라흐만과 개체 인간의 본질인 아뜨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는데, 붓다는 이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그 세계관을 엎어버립니다. 아뜨만 같은 건 없다는 거지요. ‘아뜨만’을 마땅한 뜻으로 번역할 수 없어서 ‘我’로 번역하여 이를 ‘무아’라고 번역하는데, 그러다 보니, 마치 주체로서의 ‘나’가 없다는 식으로 사람들이 착각하곤 한다는 건, 앞 ‘아뜨만’ 항목에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붓다가 깨달은 후 첫 제자 다섯 사람에게 세계의 진리를 가르쳤는데 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내용이 앞글에서 말씀드린 사성제, 즉 세상은 고통이라는 내용이고, 그다음이 바로 영원한 ‘아뜨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이때 붓다가 아뜨만이 없음을 가르치면서 든 예가 바로 오온(五蘊)이지요. 스깐다skandha가 다섯이 덩어리져 있다는 겁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오온과 불교가 말하는 그 구체적 다섯은 약간 다릅니다. 그러면 같은 의미는 뭘까요? 나라는 존재는 오온의 조합일 뿐이며, 각각은 끊임없이 변하니, 고정된 건 없겠지요. 그러하니, 오온의 다섯 가지가 뭔지, 그건 중요한 게 아니겠지요. 다섯 가지가 아니고 여섯 혹은 일곱이 될 수도 있고 더 적을 수도, 다른 조합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겠지요. 중요한 건, 인간이란 불변의 어떤 본질, 영혼 같은 것으로 구성되지 않고, 극복해야 할 그러나 극복하지 못하고 늘 좌절하는 어떤 ‘잡것’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게 나에겐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곤 합니다. 젊었을 때는, 분노였던 것 같아요. 이루어 낼 수 없는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이미지와 말이 넘치는 지금, 보통의 현대인에게는 드러내고 싶은 욕이 가장 큰 오온 덩어리인 것 같기도 합니다만, 당신에게는 무엇인가요? 그 변화무쌍한 색-수-상-행-식 혹은 또 다른 어떤 덩어리와 그것들이 마구 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기에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는, 그러나 얽매여서는 안 될 그것 말입니다. 붓다는 오온을 극복의 대상으로 봤는데, 그 극복이란 다름 아닌 삶 즉 물질세계를 부정하는 것, 아닌가요? 삶이란 대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