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3. 바라밀 Paramita 波羅密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붓다가 설파한 가르침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그 길을 가면 되고, 그 길을 각색하거나 재해석하여 새로운 의미로 만들어내는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그 길을 가면 되는 겁니다. 붓다가 오랜 수행 끝에 찾은 길은 당시 힌두교 사상가들이 설파한 것과 달리 세계는 불변의 어떤 본질이라는 건 없다, 그러니 세상이 다 부질없는 것이고, 그러니 세상 밖으로 나가 팔정도의 길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 안에서 추구하는 가족, 재산, 관계, 제사, 업과 윤회 등이 모두 무의미한 것이니 그것을 부인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 길은 세상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갈 수 없지만, 그의 길을 사모하는, 즉 힌두 사회 품 안에서 살면서 붓다의 길을 가고자 하는 모순된 생각을 가진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많은 신도에 의해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길, 즉 대승불교라 부르는 그 길은 세상 속에서 그 현실을 인정하고, 그 위에서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맞춰 살아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그 목표를 빠라미따paramita라고 합니다. 원어의 뜻으로는 완성, 성취 같은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학자에 따라서는 최고의 경지 즉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게 완벽한 번역어가 되지 않아, 많은 불교 용어가 그렇듯, 이 또한 음역으로 많이 사용해 왔지요.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이 ‘바라밀’이라고 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기 불교 즉 깨달음을 추구하는 불교는 500년 경이 지난 뒤에 큰 변화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그것을 큰 배 – 힌두교와 불교에서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것을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이쪽 강둑에서 저쪽 강둑으로 건넌다고 생각했습니다. - 라는 의미의 대승불교라 부릅니다. 이 대승불교에서는 이 바라밀을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기르는 핵심 덕목으로 가르치는데, 보시, 계율, 인욕, 정진, 선정 그리고 반야의 여섯 가지로 들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방편, 서원, 힘, 그리고, 지식이 더해져 열 가지가 됩니다. 어차피 세상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한 방법으로 찾은 덕목들이어서 주로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같이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라 할 수 있습니다. 초기 불교의 붓다 즉 깨달은 존재가 아닌 중생 구제를 목표로 삼은 것이기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이 강한 것들이지요.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이 바라밀의 목표라는 것은, 개인이 아닌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수단이었고, 이를 통해 인도, 중국, 한국 등 대승불교를 널리 받아들인 나라의 사회는 바라밀에 의한 사회적 윤리 공동체가 굳건히 세워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 등 유교적 세계관이 굳건히 세워진 동아시아에서는 바라밀에 의해 불교의 덕목들이 유교 안에서 재해석되고 실천되면서 불교가 이 사회에 굳건히 뿌리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에서 생각해 볼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여섯 가지 혹은 열 가지의 바라밀이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불교 전통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바라밀이 여섯이든 열이든, 그 각각이 무엇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중생 구제 즉 대중과 더불어서 함께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것을 세우는 일이 그 뜻에 잘 부합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 공동체가 사회의 여러 약한 고리를 찾아내 활동하는 실천적 행위들이 바라밀의 정신에 잘 어울리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환경을 보호하는 운동을 펼친다거나 남녀의 성평등을 위한 활동을 펼친다거나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들을 위한 이런저런 기관을 설립해서 복지 운동을 펼친다거나 하는 것들이겠지요. 물론 이런 대중적 사회 운동뿐만 아니라, 바라밀이 그랬듯, 개인적 수행도 마찬가지로 병행하였듯, 우리 사회에서 개인 차원의 수양도 반드시 포함이 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대에 필요한 바라밀이 뭘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제가 보는 지금 우리의 세상은 질투의 각축장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자신이 잘 나가고, 성취한 것을, 모든 수단을 다해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듯합니다. 그들의 질투는 그들이 행위이니,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저 참거나 – 여섯 바라밀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참는 것 즉 인욕이 있습니다. 다른 글에서 단독으로 다루겠습니다. - 피하는 게 좋은 길이겠지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참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으니, 내가 드러내지 않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이미지와 SNS로 점철된 현대 사회에서의 삶,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참으로 어려운 길일 것임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습니다. 그러니 날마다 시시때때로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싸웁니다. 드러내지 않아서 남이 질투의 늪으로 빠지지 않게 하고자 하는 거지요. 이 시대에는 이 시대에 맞는, 내 자신에게는 내 자신에게 필요한 어떤 바라밀이 있어야 할 겁니다. 저에게눈 드러내지 않음입니다. 당신에게는 당신이 따라야 하는 바라밀이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