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4. 마디야마 Madhyama 中道


히말라야 산록의 한 작은 공화국 전통을 유지하던 왕국의 왕자가 스물아홉 되는 나이에 모든 안락함과 즐거움의 삶을 버리고 기약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세상 밖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깨달음을 얻어냈다 하여 우리는 그를 붓다라 부르지요. 그는 출가 후 어떻게 해야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런 길을 가는 수행자들은 아주 많았지만, 그 사회의 전통이라는 게 그 길은 각자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면서 찾는 것이지, 딱히 정해진 혹은 규정된 길을 믿음으로 가는 그런 건 없었습니다. 그 또한 직접 부닥치기로 했지요. 그가 처음 택한 길은 극단적인 고행의 길이었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것으로만 살펴보면, 그는 하루에 콩 한 알이나 깨 한 톨 정도만 먹으면서 숨을 억지로 멈추는 고행을 시도했고, 당시부터 지금까지 인도의 수행자들이 행하는 가시밭에 앉거나 눕고, 불 속에서 수행하는 따위의 극단적 고행을 수행했지요. 모든 생각과 감정 혹은 감각 같은 것을 버리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소위 우리가 쉽게 말하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당시 힌두 수행자들이 널리 행하는 길을 따라 시도해 본 거지요. 그런데, 남는 건,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약해진 몸과 망가진 마음뿐이었습니다. 고행은 약 6년간 지속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실패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출가 이전의 안락과 편안의 세상 길에도 깨달음이 없지만, 그 반대의 극한 고행에도 깨달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이내 고행을 포기하고, 마을에 사는 수자따Sujata라는 여인이 건네준 미음을 먹고 다른 길을 찾습니다. 그리고서는 그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하는데, 그 길이란 다름 아닌 마디야마madhyama 즉 가운데의 길이라 스스로 규정합니다.


붓다는 그 가운데의 길 즉 중도(中道)를 두 가지 극단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니, 하나는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스스로 괴롭히는 고행이라고 설명하지요. 그러면서 중도는 두 가지의 길을 버리고 찾는 여덟 가지의 길이라고 설명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팔정도라고 하니, 중도란 팔정도입니다. 그걸 구체적으로 하나씩 열거해보면,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언어, 바른 행동, 바른 일,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 바른 집중, 이렇게 여덟 가지입니다. 그런데 누구든 쉽게 생각할 수 있듯, ‘바르다’라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인데,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바른’의 뜻은 무엇일지, 듣는 사람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인도의 세계관이 항상 그렇듯, 직접 본인이 실천해보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또한 비유를 들어 예화로 설명을 합니다. 그렇다고 그 개념이 명확하게 규정되지는 않지요. 언제든지, 개인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규정이 달라질 수 있게 되지요.


어느 날 붓다는 고행을 힘들게 수행하며 명상에 전념하던 수행자 수자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악기인 거문고를 켤 줄 아느냐? 수자따가 그렇다고 답하면서, 그것은 줄을 너무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너무 팽팽하게 하면 끊어져서 이 또한 소리를 낼 수 없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붓다는 그렇다고 동의하면서, 수행도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지요. 여기에서 줄을 느슨하게 매는 것은 그가 버리고 온 세상의 안락의 길이고, 줄을 팽팽하게 매는 것은, 고행의 길을 뜻하는 것임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비유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은 중도 즉 팔정도가 무엇인지 잘 이해가 되시나요? 그 방향은 이해가 되지만, 구체성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을 겁니다. 다른 이야기 하나 들어보시지요. 붓다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르치는 것은 배와 같아서 강을 건너는 데는 필요하지만, 강을 건넌 후에는 내려놓아야 하는 수단임을 분명히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팔정도란 수단이니 그에 얽매이는 것은 집착이고, 그 집착은 버려야 하는 것이란 의미지요. 다른 말로 하면, 그 배는 어떤 이에게는 뗏목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1인용 배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여럿을 태운 큰 배일 수도 있다는 의미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수단은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고, 궁극에서는 버려야 하니, 팔정도도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붓다가 찾은 그리고 가르친 진리 즉 담마(법)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니, 그 법은 후대에 가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가르친 겁니다. 또 다른 예화 하나를 들어보면서 조금 더 고민해보시지요. 어느 날 한 제자가 붓다에게 물었습니다. 누군가 독이 묻은 화살을 맞으면, 독화살에 맞은 사람이 의사에게, ‘화살을 쏜 사람은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그 화살은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는지를 묻지 않는 것과 같으니, 알 수 없는 죽음이나 사후세계 혹은 우주의 본질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탐닉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힌두교의 범아일여와 같은 철학, 윤회와 같은 사변에 빠지지 말고, 세상의 고통을 벗어나는 데 힘써야 한다는 말이지요. 결국, 팔정도란, 고(苦)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수단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면서,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중도는 무엇일까요? 사회정치적으로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을 위한 진보와 자본가와 기득권을 위한 보수의 사이에 선 자유주의의 길입니까, 아니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남의 행위를 규정하고 비판하지 않으면서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시시때때로 태도가 바뀌는 모호의 길입니까? 아니면, 나와 내 가족 혹은 내 국가, 내 종교에 이익이 되면 원칙도 없이, 약속도 없이, 논리도 없이 무조건 지지하고 행동하는 변화무쌍한 진영의 길을 걷는 겁니까?


3-4. 마디야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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