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5. 니르와나 Nirvana 涅槃


붓다가 가진 세계관 즉 초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을 하나 고르라고 하면, 단연 니르와나nirvana입니다. 불교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든 아니든, 우리가 가장 많이 들어본 이 열반이라는 어휘는 산스끄리뜨 어휘 니르와나를 음차하여 적은 것이니, 굳이 그 한자어의 뜻을 알거나 그 어려운 한자를 외워서 적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 한 자 한자가 뜻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앞에서 다뤘던, 겁, 찰나, 바라밀 등과 같은 현상입니다. 싯다르타 왕자가 붓다라고 불리게 된 건, 그가 6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게 열반에 이른 것으로 봅니다. 물론 그 열반이 완성된 것은 죽음으로 완전한 입적 즉 적멸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으로 봅니다.

븟다가 열반이라고 정의한 것을 딱 잘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붓다도 열반이라는 게 이러이러 한다고 직설적으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리하지 않았으니, 그것을 겪지 못한 우리 같은 범인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자라에게 속아서 끌려온 토끼가 용왕에게 자기가 사는 곳, 땅을 설명할 방법이 물속에선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도 붓다가 가장 비슷하게 그 상태를 형용한 것은 '갈망의 불을 끄는 것'입니다. 이를 조금 더 쉽게 설명하자면, 욕망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욕망이란 무엇일까요? 옳고 그름도 있을 테고, 불굴의 의지도 있을 테고, 혁명의 불꽃도 있을 겁니다. 사랑도, 미움도, 휴머니즘도 다 해당합니다. 그 모든 걸 마치 장작불을 물 한 동이로 촥~ 끼얹어 끄라는 겁니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전제는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속 삶에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일단, 세상의 모든 관계 다 끊고 세상 밖에 나가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르와나를 위한 수행은 모든 관계를 끊은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키워야 할 자식이나 모셔야 할 늙은 부모가 있어, 혹은 사랑하는 아내가 있어 세상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은 세상의 관계를 끊을 수 없기에, 그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모든 행위가 인(因)이 되어 다음 세상에 과(果)로서 환생해야 한다는 게 붓다도 인정한 당시의 세계관이어서, 그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그 인을 없애야 하고, 그러려면, 세상 안에서의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서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니르와나 또한 불교의 다른 여러 개념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힌두교에 있었던 개념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세상 안에서 모든 욕망을 다 제거하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우빠니샤드에 나오는 신화 이야기를 보면, 어떤 왕이 왕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하면서도 니르와나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 왕은 니르와나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지요. 힌두교는 세상을 버리지 않고 세상 안에서 뭔가를 이루는 길을 설정해놓은 종교인데, 이를 불교가 부인하였으니, 니르와나는 세상을 버리고 떠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붓다가 가르친 겁니다. 그 왕이 말하는 니르와나는 육체와 정신, 쾌락과 고통을 초월한 영원한 아뜨만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바로 니르와나고 그것이 윤회에서 벗어난 해탈이라고 가르치지요. 어느날, 그 왕은 왕궁이 큰불에 휩싸여서 다 타버리는 중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한 채 흔들리지 않았는데, 그는 불이 궁전과 재산을 다 태울 수는 있어도, 영원한 아뜨만 자체를 훼손할 수 없다고 가르치지요. 힌두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가운데 하나인 바가와드 기따에서는 더 분명하게 니르와나를 설명합니다. 신 끄리슈나가 선한 쪽, 장수 아르주나에게 마음에서 비롯된 모든 욕망을 버리고, 자신의 아뜨만 안에서 만족하는 자는 니르와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가르칩니다. 끄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성공과 실패의 이중성에서 벗어나, 아뜨만과 브라흐만이 같음을 깨달으라고 권합니다.


힌두교는 이 책의 주제인 불이이원론의 입장이니, 세상 밖과 세상 안이 다르면서 결국 같은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니르와나는 세상 안에서 도달이 가능한 것이 되는 겁니다. 붓다는 이런 힌두교의 불이론을 부인했지만, 결국 시간이 가면서 불교는 그것을 받아들여 나중에 대승불교에 가서는 니르와나가 아닌 세상 안에서의 행위에 의한 해탈의 경지가 가능한 것으로, 교리가 바뀌게 되지요.

3-5. 니르와나.jpg

니르와나는 불교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라 그것을 그리는 데는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숙고 끝에 저는 화면을 둘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화면이 대부분은 모든 욕망을 그렸는데, 가장 화려한 색으로 서로 덕지덕지 모여서, 앞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듯, 모든 물질과 감각과 인식이 덩어리진 오온으로서의 형상으로 그렸고, 그것이 끝난, 즉 모든 욕망이 장작불 꺼지듯 완전히 꺼진 상태를 화면 전체를 완전히 까만색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리고 난 후 오랫동안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열반이라는 게 후대의 대승불교에 가면 결국 세상 안에서도 도달이 가능한 것으로, 대체된다는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서였지요. 그래서 그 욕망의 형형색색이 까만 경계 안으로 조금씩 침투해서 들어가는 의미를 형상으로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추상화에는 약간의 지시적 이미지가 있는 것도 있고 그게 전혀 없는 이미지인 경우도 있는데, 이 니르와나는 추상화지만,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지시적으로 표현하는 게 더 좋을 듯해서, 그렇게 그리기로 한 겁니다. 이 그림과 함께 니르와나의 개념을 조금이나마 이해의 감을 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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