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II. 붓다, 세상을 버리고 떠나다. 6. 아난다 Ananda 法悅


벌써 20년이 넘은, 오래된 프랑스 영화 《세 가지 색: 블루》는 그 제목을 프랑스 국기 삼색 가운데, 하나인 파랑에서 따왔다. ‘블루’의 부제는 자유다. 영화가 말하는 그 자유는 정치적인 혹은 경제 사회적인 자유가 아니고, 실존적인 혹은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다. 좀 더 부연하자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어야 하는 삶은 고통이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며 마침내 그 소망을 이루는데, 그걸 영화는 자유라 하고,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맨 첫 번째의 가치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말하는 다른 메시지가 있다. 그 자유 끝에 오는 것은 다름 아닌 기쁨이라는 사실이다. 감독이 붓다의 세계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와 붓다의 사고 체계는 매우 비슷하다. 삶을 고통으로 보는 것이나 그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 최고의 궁극이라는 것이나, 그 궁극을 이루고 난 후 얻는 것은 기쁨이라는 것, 모두 같은 논리적 귀결이다. 해방 후 얻는 기쁨, 이것이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아난다ananda이다.


붓다는 6년의 수행 끝에 도달한 니르와나, 즉 사성제와 연기법을 통찰하면서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고, 깨달음을 얻고 난 후 그 순간 모든 번뇌가 끊기고, 고통이 사라지면서, 스스로 해탈되었고, 다시는 윤회하지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그때 생긴 상태, 그 엄청난 연안하고 온전함을 아난다라고 말합니다. 아난다는 문자 그대로, 기쁨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세속의 일에서 느끼는 감정으로서의 기쁨이 아니고, 범아일여 상태에서 갖는 내면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 또한 힌두교에서 온 것이고, 우리와 세계관이 크게 달라 마땅히 그 뜻을 번역하기가 아려워 흔히 ‘법열’이라 합니다. ‘법열’에서 ‘법’은 불교를 의미하는 일종의 접두어니 그냥 ‘열’이라고 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냥 ‘열’이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쓰는 ‘열’ 즉 기쁨과 똑같이 인식할 수 있어서 그 ‘열’을 번역어로 잘 쓰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이를 환희라고 하기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그렇다고 큰 기쁨이라고 하자니 그것도 마땅치 않아, 그냥 ‘아난다’라고 쓰는 겁니다. 아난다는 감정 즉 감각의 한 상태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모든 감각에서 벗어난 것이니 당연히 감각으로서의 기쁨이 될 수 없겠지요.


이러한 개념의 출발은 힌두교입니다. 힌두교에서 아난다는 절대 존재 즉 브라흐만의 세 가지 속성을 알아차리는 건데, 그 세 가지 속성이란, 사뜨Sat 즉, 진리, 찌뜨Chit 즉 앎 그리고 아난다Ananda 즉 기쁨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면 기쁨이 온다는 거지요. 큰 틀에서 볼 때 불교에서의 아난다와 힌두교에서의 아난다는 같습니다. 기쁨이라는 것이지요. 힌두교에서는 앎 혹은 절대 본질과의 일체화로부터 오는 기쁨이고, 불교에서는 해방으로부터 오는 기쁨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이 아난다를 때로는 법 즉 진리를 들을 때 얻는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난다라는 게 반드시 니르와나 즉 깨달음을 얻고 그 이후로 들어가는 경지가 될 필요는 없게 되겠지요. 아니면, 깨달음이라는 게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게 될 수도 있다는 논리가 되겠지요. 결국, 초기 불교에서도, 붓다가 설하는 법을 듣고, 깨우치면 아난다를 얻고, 이후 디야나 즉 선정의 경지로 들어간다는 순서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난다의 성격이 애매한 것은 그 개념이 논리로 정리되는 게 아니고 체험 혹은 실천으로 정리되기 때문이지요. 그 체험 혹은 실천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서 아난다 혹은 다른 개념도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변하게 되는 겁니다.


초기 불교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난다는 절대적인 게 아니고 수시로 얻을 수 있는 기쁨의 경지가 됩니다. 나중에 대승불교가 크게 번성할 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나중에 독립 글로 다루겠습니다. - 즉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개념이 나오는데, 그 이치를 깨달을 때나, 붓다가 제자들에게 꽃을 보여주자, 가섭 존자라는 제자만 옅은 미소로 답을 했다는 염화시중의 미소도 모두 아난다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모든 게 다 깨달음이 되는 거니까요. 이런 변화가 나중에 힌두교에서는 절대 신과 엑스터시를 접하거나 육체적 깨달음을 얻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아난다라고 말하는 정도로까지 변화하지요.

3-6. 아난다.jpg

이렇게 변화가 심한 개념을 추상화로 그리려 하니, 참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추상화를 아무런 상징이나 지시적 성격을 갖는 지시체 없이 점, 선, 면을 이용해 그린 도형 위주로 그리면 일단 그리고 그 위에 의미 부여를 하면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추상화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의 세계관을 이해하려 하는 목표와 거리가 멀게 되어 저는 그 둘의 방식을 섞었습니다. 화면 대부분은 우리가 갖는 모든 다양한 감정과 감각을 그린 것이고, 오른쪽은 붉은색으로 표현한 아난다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 기쁨을 파란색으로 그리지만, 저는 그 기쁨을 단심丹心이라 말하는 우리 전통의 붉은색으로 말하는 겁니다. 그 붉게 칠해진 네모난 형상은 들뜨거나 솟구치는 건 아니고 태평양같이 아무런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자 하는 겁니다. 체험하지 않으면 제대로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맥락이라도 알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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