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V. 세상이라는 밭 7. 슈라빠Shrapa 저주


힌두 신화를 보면, 누군가의 저주를 받는 장면이 참 많이 나옵니다. 그 저주의 힘은 다음 생까지 연결되니, 그 효력이 무시무시하지요.그 저주 장면을 잘 분석해보면, 그들이 사회 내에서 추구하는 게 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슈누Vishnu는 세상을 유지하는 신이지요. 구원의 신이라고 보면 되니, 악을 징벌하는 일을 하이지요. 어떤 이야기에, 비슈누가 악마 여신을 죽이는데, 그걸 본 어떤 선인이 비슈누가 '여자'를 죽인 것을 보고, 분노하여 그에게 영원히 태어나고 죽는 윤회의 형벌을 저주로 내렸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약한 존재인 여자를 죽이면 안 된다는 거지요. 이야기 하나를 더 들어 보실까요? 서사시 마하바라따의 주인공 빤두 가문은 용맹함을 덕으로 삼고 전쟁과 사냥을 업으로 삼는 전형적인 끄샤뜨리야입니다. 빤두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슴 한 쌍을 보았는데, 그 사슴 두 마리는 막 교미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빤두는 화살을 날렸고, 숫사슴이 맞아 죽었는데, 죽기 직전 그 둘이 갑자기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어떤 선인과 그 아내가 사슴의 모습으로 변해 숲속을 노닐다가 사랑을 나누려던 참이었지요. 그 선인은 죽기 직전 빤두에게, “너는 내가 내 아내와 하나 되는 순간에 날 죽였다. 그러므로 너도 너의 여자와 하나 되면 죽을 것이다,”라는 저주를 남깁니다. 그래서 빤두는 자식을 갖지 못했고, 마하바라따의 주인공 다섯 형제는 아버지가 빤두가 아니고 여러 신을 남자로 맞아 낳은 자식들이지요. 결국, 빤두는 그 저주대로 자기 여자와 섹스를 한 후 죽습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어처구니없는 저주 아닌가요? 사냥은 끄샤뜨리야의 의무이자 덕성인데, 사슴을 죽였다고 저주라뇨? 그런데 이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사슴을 죽인, 원래 사람이었던 그 생물을 죽인 게 문제가 된 게 아니고, 성행위를 하려 하는 짐승을 죽였다는 게 문제인 겁니다. 짐승일지라도 사랑을 나누는 짐승은 죽이지 말라는 거지요. 우리가 아는 사랑이라는 정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생산하는 행위로서의 섹스를 말하는 거지요. 고대 힌두교가 얼마나 물질과 가족 중심 사회를 중시하였는지를 말하는 겁니다.


저주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은데, 하나만 더 들어 보시죠. 옛날, 옛날에 한 선인이 살았는데, 어느 날 그가 지상을 돌아다니다가 하늘에서 온 요정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은 아름다운 화환을 두르고 있었는데, 선인이 그 화환에 넋이 빠진 것을 보고, 그 요정 여인이 정중하게 그 화환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상으로 돌아왔을 때, 코끼리를 타고 길을 걷던 장수 인드라Indra 신을 만났습니다. 그 선인은 자기가 받은 그 화환을 인드라에게 건넸고, 인드라는 화환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코끼리 머리에 얹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코끼리는 꽃에서 나는 향기에 짜증이 나서 화환을 땅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밟아버렸습니다. 이를 본 그 선인은 자신의 선물이 그렇게 짓밟힌 것에 분노하여 즉시 인드라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화환이 꾸겨진 것처럼 인드라는 이제 천상-지상-지하를 다스리던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라고 저주합니다. 이 신화에는 고대 힌두 브라만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잘 들어가 있고, 종교의 상징도 절묘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좀 쉬운 상징부터 말하자면, 꽃 화환은 힘과 부귀영화의 에너지를 비유한 것인데, 만물이 생성되고 자라고 부유하게 되는 근본 에너지라는 겁니다. 그것을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코끼리가 짓밟아버린 거지요. 힌두교에서는 영적인 것과 물적인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에너지를 상실하면, 물적 에너지도 자연히 상실된다는 의미를 제시하는 겁니다. 신과 아수라 간의 감로수를 둘러싼 태초의 우주적 싸움을 두고, - 나중에 이 신화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될 겁니다. - 이 이야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그리 녹록지 않은데, 결국 신을 따라 가면 선이 악을 이기게 되고, 삶에서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것이니, 우주의 섭리를 묵묵히 따르고 하라는 대로 순종하면서 살라는 의미지요. 아울러 힌두 신화 뿐 아니라 모든 신화가 다 그렇지만, 신도 어리석기도 하고, 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선인이 성질이 아주 더럽고 포악하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신이나 선인이 대자대비만 하고 은혜롭기만 하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인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겠죠.


저주는 신이나 선인 혹은 고행을 통해 영적 에너지를 축적한 수행자나 브라만 등이 내릴 수 있습니다. 단순한 분노나 악의로는 내릴 수 없고, 그 죄가 다르마를 어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힌두교에서는 저주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 저주를 내린 자에게도 그 업보가 돌아간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쉽게 저주하지 않으며, 주로 최후의 수단으로 간주합니다. 저주의 개념이 있으니, 당연히 축복의 개념도 있겠지요. 힌두들은 주로 출생, 결혼, 수행 시작, 전쟁 출정, 왕위 즉위 등 중요한 삶의 전환점 혹은 통과의례 때 브라만이나 부모가 내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축복을 받았다 해도, 교만하거나 받은 축복으로 다르마를 어기는 일을 하면 그 축복은 없어져 버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저주와 축복 모두, 사회를 잘 유지하기 위해 브라만 법률가들이 정해놓은 사회적 의무와 도리를 잘 지키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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