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 만민은 불평등 하나니 3. 바르나Varna 카스트
이전 글 끝부분에서 간단히 언급한 문제를 좀 더 살펴보아야겠습니다. 힌두교에 의하면 사람은 모두 브라흐만-아뜨만의 현신으로 당연히 평등한 존재인데, 어떻게 위계의 바르나varna 체계가 성립할 수 있습니까? 논리적으로 완전한 모순인데, 힌두교 세계관에서는 어떻게 그 모순을 논리적으로 합리화 하는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인도인의 세계관을 잘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참, 바르나란,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사성(四姓) 계급이라는 것 즉 넷으로 구분된 카스트를 말하는 겁니다. 맨 위의 브라만은 제사장과 교육의 일을 하고, 그 아래 끄샤뜨리야는 왕, 무사 등의 일을 하며, 그 아래 바이샤는 농민, 상인, 장인 등이고 그 아래 슈드라는 온갖 노역을 도맡아 하는 계급 제도라는 것이지요. 철저히 불평등 체계로, 특히 슈드라는 사회에서의 행위가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이 바르나라는 개념은 고대 인도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정도이니, 사실, 신학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인 브라흐만-아뜨만과 실제 사회에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바르나와 그에 따라는 다르마(법, 의무, 도리)는 완전히 상충되는 거지요.
힌두교에서 모든 인간은 브라흐만(Brahman)과 아뜨만(Atman)의 현신이라는 세계관은 베다의 끝자락인 우빠니샤드에 기반한 불이론(Advaita)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절대적 실재(브라흐만)를 공유하지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한 겁니다. 그런데, 베다의 다른 부분에서 인간은 네 계급으로 나뉘는데, 이는 태초의 유일 원인(原人)이 스스로를 제사 지내 만들어낸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니 슈드라는 맨 아래에, 부르만은 맨 위에 위치하는 것은, 절대 성전이 규정하는 바라는 거지요. 그렇게 되니, 이 둘은 모순이 되는 거지요. 이 모순을 풀기 위해 즉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계급 제도를 만들긴 해야 하는데, 그게 신학의 근본과 모순인 것 같으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오는 겁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 업과 윤회의 논리지요. 이에 따르면, 사람의 현생 위치는 전생에서 쌓은 행위의 결과 즉 까르마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니 이 이론을 대입하면, 누군가에게 주어진 현생의 바르나는 전생에 스스로 쌓아놓은 결과이고, 이는 본질적으로는 모두 같은 브라흐만의 현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절묘한 합리화지요? 그러니 이 업과 윤회론에 따라 브라만들이 규정해놓은 사회적 의무 즉 다르마를 성실히 수행해야 다음 생에는 그 브라흐만이 좀 더 좋은 모습으로 현현한다는 거지요. 나무가 겨울이 되어 가지와 잎이 다 떨어지는 건, 봄과 여름의 결과이고, 겨울에 잘 견디면 다시 봄에 잎과 꽃을 피우게 된다, 그 둘은 현상의 변화일 뿐, 본질적으로 다른 건 아니라는 논리지요.
신학은 어떤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로, 현실의 반영이 아닙니다. 거기에 따라 현실이 생성하는 혹은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 현실 사회에서 필요한 제도가 역사적 맥락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면, 신학은 자신의 담론을 동원하여 그 권력자의 현실을 합리화하는 것이니, ‘브라흐만-아뜨만’ 개념과 모순되면서 ‘업과 윤회’ 개념은 세속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체계 즉 바르나 체계로 작동하지요. 이러한 현상은 모든 종교사에 나타난 역사적 현상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정치와 신학의 협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의 저항이 성공하면, 사회는 크게 바뀌는 것이고, 성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더 봉건적으로 자리를 잡는 겁니다. 인도사에서도 몇 번의 저항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게 붓다지요. 붓다는 전생에 쌓은 업보에 따라 바르나의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행하는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라고 업과 윤회론을 철저하게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사회 체계를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사회 밖에 공동체를 건설하여 그 이상을 이루려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지요. 또 하나, 좋은 예로 들 수 있는 게 있는데, 이 장(章)의 마지막 꼭지로 설명할 박띠bhakti라는 신앙 운동입니다. 인도 중세 시기에 카스트 체계에서 주로 하층에 속한 여러 스승이 나타나 사람은 누구나 카스트에 무관하게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신에 대한 무한한 순종과 사람, 헌신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 또한 힌두교의 사회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차라리 종교에 더 얽매이게 만드는 결과만 나아 그 본질적 세계관, 인간은 모두 똑같이 ‘브라흐만의 자녀’라는 의미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실패하고 맙니다.
결국, 신학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든지, 브라흐만의 똑같은 현현이라고 하든지, 사람이 곧 하늘이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늘을 섬기는 것이라 하든지, 그 어떻게 담론을 가져가든지 간에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학일 뿐입니다. 그 신학이 사랑과 평등과 인권을 말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권력의 합리화 도구로만 작동해 온 것이 인류의 모든 역사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 가운데 하나가 인도일 테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