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 만민은 불평등 하나니 2. 쁘라나Prana 숨


이 책의 제목으로 달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이라는 문구는 힌두교의 세계관이 상대주의에 기반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사실로, 그런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앞의 글에서 설명했던 힌두교 최고 경전인 슈루띠 문헌에서부터 펼쳐졌겠지요. 그렇지 않고서는 그 상대주의 세계관이 오랫동안 힌두교의 가장 탄탄한 기반으로 작동하지는 못했을 테니까요. 그러면 그 슈루띠에 나오는 상대주의 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개념은 무엇일까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제2 장(章)에서 자세히 설명한 우주와 인간의 보편 절대성인 브라흐만과 아뜨만 개념입니다. 그런데, 절대 본질 브라흐만-아뜨만이 모든 존재가 다 같으면서 다 다르다는 상대주의로 발전하기에는 그것과 통합하는 뭔가 다른 개념이 있어야 할 겁니다. 학자들은 그것을 베다와 우빠니샤드에 널리 등장하는 쁘라나prana 개념으로 봅니다.


쁘라나는 산스끄리뜨어로 ‘숨’을 의미합니다. 다른 비슷한 말로 풀면, 생명력이라고도 할 만하고, 한의학이나 도가 등에서 생명력이면서 우주 에너지의 흐름을 의미하는 기(氣)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원초적인 의미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숨’과 가장 가까워서, 일차적으로 ‘숨’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에 더 쉽겠습니다. ‘숨’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전통적 개념으로 살아 있는 생명의 기준은 숨의 유무겠지요. 사람이 죽음을 확인하는 것도, 코로 나오는 숨이 멎은 것을, 의미하였고, 그것을 숨이 멈췄다거나 끊어졌다거나 하는 식으로 표현하지요. 이 ‘숨’과 비슷하면서 힌두교의 쁘라나와 아주 비슷한 개념으로 바이블에 나오는 ‘생기’라고 한국어로 번역된 것도 있습니다. 창세기 2장 7절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의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생기’가 힌두교의 ‘쁘라나’와 매우 비슷합니다. 그런데, 둘의 사유는 근본적으로는 비슷한데, 하나는 유일신교가 되고 하나는 다신교가 되었습니다. 이 차이는 바로 쁘라나 개념의 변화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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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베다인 [리그 베다]는 ‘쁘라나’를 인간 생명의 존재적 근원으로서 숨으로만 보았습니다. 실제적일 뿐, 상징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 의미는 없었던 단계지요. [리그 베다]의 한 장례 찬가를 보면, 죽은 사람의 쁘라나를 이 자리에 남겨 달라는 소망을 담은 구절이 있습니다. 죽으면 사람은 숨을 이승에 남기고 다음 세상, 즉 죽음의 세계로 간다는 의미지요. 다른 구절에서는 목숨을 지키게 해달라는 기원을 쁘라나를 지키게 해달라고 쓰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그들은 쁘라나를 인간의 숨이면서 동시에 생명으로 인식한 것이 분명합니다. [리그 베다] 이후 만들어진 제사 의례에 대한 찬가집 [야주르 베다]Yajurveda를 보면, 쁘라나는 이제 단순히 인간의 생명력의 숨으로서의 존재를 넘어 제사 의례 속에 존재하는 만물 생명을 지키는 에너지로 확장이 됩니다. 당시는 사회가 조금 더 복잡해지면서 제사 행위가 가장 중요한 사회 행위였고, 그 의례가 우주적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발전할 때인데, 쁘라나가 그 제사 의례를 지키는 에너지로 나타났다는 것은 쁘라나가 당시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가장 늦게 만들어진 베다인 [아타르와 베다]를 보면, 쁘라나가 우주 생명의 주재자로서 나타나는 어떤 힘으로 신격화되면서 찬미의 대상으로까지 성장합니다. 쁘라나가 신으로 의인화되었다는 말인데, 곧 인간 생명에서 벗어나 우주 전체의 생명으로 그 개념이 확장된 거지요. 이후 우빠니샤드에 가서는 ‘쁘라나’는 생명을 유지하고 우주를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언급되지요. 그러면서 당시 힌두교 세계관의 최고 개념인 브라흐만-아뜨만과 쁘라나가 일체화됩니다. 쁘라나가 곧 브라흐만이다, 라는 표현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이제 우주의 본질, 브라흐만은 곧 쁘라나가 되고, 쁘라나는 우주 전체 모든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모든 생명은 쁘라나이면서 브라흐만의 현현이니 다 다르지 않고 같은 것이 되는 거지요.


인간 한 개체의 생명력에서 출발하여 우주 모든 존재의 생명력으로 그 개념이 확장되는 쁘라나 개념을 요즘 말로 풀어보면, 평등적인 개념이 되어야 합니다. 인간이나 개돼지나 풀 한 포기나 할 것 없이 모든 존재가 우주적 에너지로 만들어진 것이니 당연히 평등 개념의 소산이지요. 더군다나 그 개념이 베다 슈루띠에서 출발하여 그 안에서 확장된 것이니 모든 존재의 평등성은 당연히 모든 것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슈루띠 아니라 더 한 것도 그들이 사회 안에서 필요로 하는 불평등성을 세우고자 하면, 거기에 맞게 각색되고, 원래 개념은 무시되기 일쑤입니다. 불평등성은 슈루띠에 근원을 찾을 수 없다고 해도, 누구도 저항할 수 없고, 평등성은 슈루띠에 근원을 둬도 현실에서 필요치 않으면, 그 필요한 부분까지만 찾아서 활용하는 것, 그것이 종교입니다. 쁘라나가 브라흐만과 만나면서 우주 존재는 모두 같은 것이라는 상대주의 종교로 발전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 안에서의 담론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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