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 만민은 불평등 하나니 1. 슈루띠Shruti 계시


지금까지 앞의 네 장(章)에서 설명한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은 크게 사회생활을 긍정하여 거기에 가치를 두는 세계관과 사회생활을 부정하여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세계관 둘로 구성해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이 가운데 인도 사회에서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전자의 세계관은 슈루띠(Shruti)라는 문헌 장르에 그 기반을 둡니다. 슈루띠는 산스끄리뜨어로 ‘들음’ 즉, ‘계시’를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기 기억이나 논리로 만든 것이 아니라, 리쉬라는 신선들이 명상하던 중 어떤 신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으로, 간주하는 그래서 적지도 않고, 암송하여 후대로, 후대로 이어 내리는 그래서 최고 경전으로 인정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슈루띠가 드러내는 것은 모두 우리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진리이며, 그래서 이해하려 하지 말고, 순종해야 하는 믿음의 전거라는 거지요. 가히 힌두교 최고 권위의 성전입니다. 인도에서는 이를 부인하면, 외도(外道)라고 불립니다. 기독교의 이단과 같이 배제의 대상으로 낙인찍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한 거부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요. 앞에서 말씀드린 사회생활을 부인하여 세상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초기 불교가 그 좋은 예지요.


슈루띠는 네 가지 장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베다(Veda)인데, 이 베다는 네 개의 본집과 여러 해설서가 있습니다. 본집이 먼저 나오고 해설서가 나중에 나왔겠지요. 베다를 처음 편찬할 때는 유목 생활을 할 때라 종교가 과히 복잡하지도 않았을 테고, 선주민과의 접촉도 별로 없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질적인 요소를 통합하고, 의례도 만들어지고, 그러다 보니 의례를 벗어나 깨달음이나 명상 같은 걸 중시하자는 움직임도 나오기 시작하면서 여러 부속서가 추가로 등장한 거지요. 그 맨 마지막의 경향이 좀 더 강하게 진행되면서, 아예 세상을 부인하면서, 지금까지의 베다의 모든 장르까지 다 부인하고 떠나버린 게 불교지요. 그러니 불교는 그 베다 전통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베다를 근간으로 하는 힌두교에서는 불교를 외도로 간주한 겁니다.


[리그베다]에서 시작하여 약 1천 년 동안, 네 가지의 베다와 여러 부록 문헌 특히 끝으로 편찬한 여러 가지 우빠니샤드Upanishad는 모두 우주의 진리를 인간이 ‘들은’ 것이라고, 당시 브라만 신학자들은 주장했고, 대중은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그 내용은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영원무궁토록 간다는 게 가장 중요한 근간이지요. 기독교 바이블과 마찬가지의 전술이지요. 성령이 임재하여 손수 적은 것이다, 라는 사실, 영원무궁토록, 일점일획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영원한 진리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런데,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 그 진리라고 하는 내용이 그 슈루띠에 나오는 것에서 변하는 게 있지 않겠습니까? 기독교 바이블같이 짧은 기간에 편찬되고, 66권으로 한정하고 난 후 추가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 내용이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겠지만 – 그게 얼마나 비(非)역사적이거나 황당무계한 것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 힌두교 경전은 슈루띠 이후로도 계속 편찬되어 나왔다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5-1. 슈루띠.jpg

그 중요한 의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슈루띠는 우주의 본질에 관한 담론을 보여줍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규정하지요. 이전에 설명한 시간에 관한 여러 세계관 즉, 윤회, 브라흐만과 아뜨만, 해탈 같은 개념들의 원형 개념을 담고 있지요.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고 상세해지면서 오늘날에 이르는데, 큰 틀은 변하지 않지만, 여러 작은 내용은 많이 변했지요. 특히 근대 이후 사회가 급격하게 변하면서 슈루띠의 내용은 사회생활과 전혀 화합할 수 없는 게 되고 맙니다. 제사를 그 문헌에 나오는 방식으로 지낼 수도 없고, 숲으로 들어가서 명상 생활을 할 수도 없고, 베다를 암송하면서 살 수도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베다를 읽지도 못합니다. 베다는 산스끄리뜨어로 쓰였는데, 그 언어는 지금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사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그 문법 또한 너무나 어렵고 복잡해 전문 학자도 해석에 이론이 분분한데, 일반인이, 설사 의례를 집전하는 브라만이라 할지라도, 베다를 외운다는 게 그리 녹록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뼈대 좋은 가문 사람들은 그 주요 내용을 통째로 외우기도 하지만, 뜻은 모르는 체, 외우는 주문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베다에 기반을 둔 여러 구조나 행위가 후대로 가면서 점점 더 사회적 악습으로 변한 몇 가지 제도나 행위들에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불평등을 기반으로 하는 카스트 체계입니다. 원래도 상당히 그랬지만, 이 체계는 후대에 아주 심하게 변질하였는데, 지금 같은 현대 민주주의 평등 사회에서도 그 존재론적 기반을 베다에 두고 신의 계시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들 생각하지요. 베다는 힌두교 문화의 뿌리이지만, 지금은 그저 상징적 의미일 뿐, 일상에 대한 실질적 영향력은 전혀 없는데, 유독 보수주의 노인들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불가촉천민이나 여성 혹은 무슬림을 핍박할 때는 베다를 근거로 삼는다는 겁니다. 혐오와 배제를 통해 자기 이익을 더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계시라는 것보다 더 좋은 무기란 존재할 수 없지요. 결국, 그 계시라는 게 실제 영향력은 없더라도 종교에서 절대적 경전으로 존재하는 한, 인도 사회가 ‘만민은 불평등하다.’는 테제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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