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 만민은 불평등 하나니 5. 다르마 Dharma 도리, 법
20년이 좀 넘은 듯, 한데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같은 생각들에 대한 몇 권의 책과 글을 읽고, 생각들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국가, 민족, 계급, 혁명, 민주화, 정의와 같은 큰 이념보다, 내 앞에 존재하는 여러 작은 것들에, 가치 부여하면서, 나와 내 주변의 일상과 그 속의 작은 것들에 관한 사랑, 이해, 존중, 격려 등으로 살아가는 삶이 훨씬 아름답다,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어려움이 있으면,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이 계급이나 진보 혹은 변혁과 같은 사회의 큰 정치 속 과업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삶이라고 보게 되었지요. 관념이 아닌 실재를, 당위가 아닌 실리를 중시하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큰 당위가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고, 나와 내 주변의 작은 가치가 사소하거나 하찮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혹은 큰 대의명분에 비해 그 가치가 우와 열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일제 식민 지배와 대한민국 건설과 전쟁 그리고 유신과 5공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독립, 민주화, 사회변혁 등 큰 가치를 오랫동안 추구해왔고, 그것에 희생하는 분들을 높이 기렸습니다. 힌두교 세계관은 바로 이런 큰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겪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가치입니다. 맥락이 같은 것이니, 우리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서 그들 사회를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의 예를 드는 겁니다. ‘큰 것이, 아름답다.’가 대의명분이라면, 그 큰 것 가운데 으뜸은 다르마dharma라고 하는 것이죠. 다르마란, 그 안에 담긴 뜻이 하도 다양해서 우리말 하나로 마땅히 번역할 만한 게 없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아마 가장 적확한 것이 될 텐데, 그러니 그것은 도덕이고, 다시 그것이 전통 사회의 법 혹은 율법이 되는 것이고, 믿고 의지하고 기대는 ‘종교’로도 번역이 가능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주의 이치를 통달하는 진리로도 되는 거지요. 그 다르마를 구성하는 기초 내지는 전제는 바로 각 사람에게 불평등하게 주어진 신분 즉 카스트인 바르나를 마땅히 받아들여 각 바르나에 주어진 의무를 성실히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위 세 카스트는 바로 이전 글에서 설명한 네 가지 아슈라마 중 세 단계의 인생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게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셋이 하나로 묶여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가 되는 것입니다. 힌두교를 한 마디로 줄이라면, 다르마의 종교라고 하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사회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힌두 사회 안에서 어떤 행위가 정당해지려면, 그 행위는 다르마와 상충해서는 안 됩니다. 다르마와 어긋나는 것은, 모두 불법이고, 이를 행한 자는 자연히 악이 되며, 그는 신에 의해 파멸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또 각색되고 또 각색되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데, 그 이야기는 어떤 자가 다르마를 지키지 않았고, 결국 그는 비슈누 혹은 그 화신에 의해 파멸되었다는 얼개로 짜입니다. 그러니 그 신은 자연히 다르마의 수호자가 되고, 그 신을 모시는 신앙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왕이야말로 또 다른 다르마의 수호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다르마를 어기면서, 악으로 대상화가 되는 행위는 무엇일까요? 흔히 그냥 ‘나쁜’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나쁜’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마이고 그 다르마는 신분의 불평등 가치이기 때문에, 그 나쁜 짓은 그 신분의 불평등을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요즘 우리 시대의 가치관인 민주-평등-자유 혹은 페미니즘이나 차별 금지법 같은 것은, ‘나쁜’ 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사악한 행위는 그 법을 가르치고, 신을 모시고 여러 의례를 행하는 브라만 카스트를 능멸하는 것일 겁니다. 브라만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왕은 신화 속에서 항상 사악한 자로 낙인찍혀 신에 의해 처벌받습니다. 그러니 브라만 사제가 가난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현실을 혁파하기 위해 어떤 왕이 과감한 브라만 억제 정책을 펴면, 그 왕은 악마가 되는 것이고, 그러다가 신화 속에서라도 비슈누의 화신에 의해 칼 맞고 제거당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르마의 합당한 뜻은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집니다. 절대적인 게시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법전이 없고, 항상 바뀌는 것이지요. 그러니 상대적인 해석이 나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그 해석의 힘은 여전히 각 시대 지역의 브라만 신학자에게 가 있으니 브라만의 사회 영향력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다르마 중심의 가르침이 힌두 사회에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게 적어도 근대화 시장 경제 체제가 크게 영향력을 끼치기 전까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힌두 사회가 지금도 여전히 보수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이런 가르침의 영향이 여전히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 하나를 들어보시지요. 옛날 어떤 왕이 있었는데, 다르마에 흔들림 없는 헌신을 하는 자로 유명했습니다. 한 신선이 나타나 그를 시험하기 위해 왕국 전체를 사원에 기부하게 속였고, 그 왕은 흔쾌히 따랐으니, 모든 걸 다 기부해 남의 노비로 살 정도가 되어버렸는데, 그 무소유의 길을 자신의 다르마로 삼았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아들이 죽었는데, 화장에 쓸 땔감조차도 없었고, 다른 사람에게 자선으로 받는 것조차 거부할 정도로 다르마를 지키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행동거지에 감동을 크게 받은 신들이 그의 왕국을 회복시키고 아들을 부활시켜 줬답니다. 결국, 다르마는 모든 것을 사원에게 바치는 희생이 필요하고, 그걸 잘 지키면, 신으로부터 보상을 받는다는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