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 만민은 불평등 하나니 6. 아힌사 Ahinsa 비폭력


힌두교의 여러 경전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권위를 지닌 것은 여러 가지 베다 문헌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 베다에 나오는 가장 정통한 종교 행위는 제사였으니, 제사라는 건 제물로 바친 동물을 죽여 그 피를 신에게 바치는 행위이니, 철저히 폭력적이지요. 그러면 힌두교는 폭력을 옹호하는 종교가 되어야 할 텐데, 왜 많은 사람이 비폭력의 종교라고 할까요? 이는 베다 시대 최고의 사회적 행위인 희생 제사를 더는 해서는 안 된다는 저항 운동이 베다 시대가 끝날 무렵부터 당시 인도 사회에서 들불에 불 번지듯 하였기 때문이지요. 윤회 개념 안에서 다음 생의 좋은 환생을 보장받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소를 제물로 브라만에게 바쳐야 했으니, 소가 없어짐으로써 자신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겪는 사람들이 브라만 기득권에 대한 저항 차원으로 희생 제사를 반대하기 시작한 거지요. 제사를 통하여 제사장인 브라만은 부의 축적을 이루었던 데 반해 농경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가 자꾸 희생되어 나가니까, 농민과 그들의 세금으로 나라를 운영하는 끄샤뜨리야 카스트가 불만을 터뜨린 거지요. 그들은 본격적으로 일어난 새로운 농업 경제를 확고하게 정착시키기 위해 제사를 통한 소의 도살을 반드시 중지시키려 했으니, 결국, 새로운 도시 문명에서 새롭게 떠오른 신흥 세력에 의해 소 보호가 널리 주장된 겁니다. 이것이 붓다가 주장한 아힌사ahinsa지요.


‘아힌사’는 폭력, 살생을 의미하는 ‘힌사’에 부정을 의미하는 ‘아a’가 붙은 어휘입니다. 따라서 붓다의 불살생이라는 것은 생명이 있는 것을 해하지 말라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의미로서 해석하기보다는 제사를 통해 소를 희생시키지 말라는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요. 붓다는 소가 있어야 생산이 더 활발하게 일어나고 그래야 더 많은 인민들이 브라만에게 착취당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후 힌두교에서 붓다의 불살생 즉 비폭력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후 힌두교에서도 동물을 희생하는 제사는 점차 금지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소가 아닌 다른 동물을 희생하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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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비폭력의 원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불살생입니다. 불살생이 힌두교에서 널리 자리 잡은 후 만들어진 신화 속 이야기를 비교해서 들어보시지요. 어떤 왕이 살았는데, 그는 다르마를 잘 지키고 아힌사에 대한 헌신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왕좌에 앉아 있는데, 두려움에 떨며 날아든 비둘기가 그의 무릎에 앉으며 간청하기를, 매가 자기를 잡아먹으려 하니 자기를 보호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매가 날아 들어와, 배가 고파 죽기 직전이니, 비둘기를 잡아먹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연의 법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를 쉬 결정하지 못한 왕은 결국, 둘 다 만족시키기 위해 비둘기 대신 자기 살을 떼어 매에게 주기로 하였는데, 결국, 자기 온몸을 바쳤답니다. 그러자 비둘기와 매가 심으로 변해 왕에게 축복을 내답니다. 이런 이야기는 힌두교와 불교 안에 너무나 많습니다. 살생하지 말라는 교훈을 널리 퍼뜨리는 거지요.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살생하지 말라면, 전쟁은 어떻게 했을까요? 인도는 전쟁이 없는 나라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힌사는 더 큰 도덕인 다르마와 상충하면 경우에 맞춰 어길 수도 있는 겁니다. 방금 위에서 말한 자기 목숨을 바친 것도, 살생 아니겠습니까? 자연의 이치와 질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살생하는 것은 허용된다는 거지요. 이런 논리가 바로 종교를 위해서 자살하는 것도 허용된다는 논리로 변질하는 겁니다. 그게 더 변하면 종교와 같은 의미로 국가를 위해서 하는 자살도 다르마를 수호하는 자살이니 용납되고, 결국 힌두교나 힌두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그 적들을 응징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용인되는 겁니다. 무슬림에 대한 테러가 일부 극우 힌두주의자 속에서 용납되는 게 이런 논리지요.


이런 논리 즉 다르마 수호를 앞세우면 전쟁 또한 얼마든지 명분 있는 것이 됩니다. 한국사에서도 불교에서 원광법사의 소위 ‘세속오계’가 있잖습니까? 살생유택, 즉 살생은 해도 된다, 가려서만 하면, 뭐 이런 의미지요. 그 가려서라는 건 해석하기 나름이니, 국가나 왕이 하고자 하는 건 가려서 하는 게 될 것임은 뻔한 이야기지요. 힌두교 경전 바가와드 기따에서 끄리슈나는 사촌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는 괴로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장수 아르주나에게 다르마의 개념을 설명합니다. 끄리슈나는 진정한 아힌사란, 이기적인 욕망이나 악의 없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 있는 법,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피하는 것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서 다르마를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결국, 아힌사 사상 때문에 인도가 각 세력끼리 전쟁을 수행하지 않은 경우는 단 1분 1초도 없었습니다. 다만, 전쟁을 피할 수 없는 명분을 축적하는 데 많은 논리를 계발했지요. 혹은 여러 세력 사이에 끼어 평화를 중재하는 외교와 (국제) 관계에서의 여러 전략의 발전 또한 아힌사 사상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아힌사를 단순히 폭력의 부재로 보는 것보다는 사상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자비로, 실제 정치적으로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문제를 관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보는 게 더 인도 문화를 이해하는 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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