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I. 신들이 노는 세계. 1. 아수라 Asura 阿修羅
인도 신화에서 악마 아수라asura와 신 데와deva는 힌두교에 많은 신들을 둘로 나눌 때 쓰는 부류입니다. 그 개념은 아리야인들이 기원전 1,500년 경 아프간을 거쳐 한 무리는 인도로 들어오고 다른 무리는 이란으로 갔을 때, 인도로 온 아리야인들이 가지고 온 거지요. 그러니 아리야인이 남긴 인도의 베다에 나타난 그들의 모습과 이란에 남긴 조로아스터교에 나오는 그들의 모습이 거의 비슷하게 나타나지요. 이후 아리야인이 동쪽 갠지스강 유역으로 이동하면서 그리고 이후로 데칸고원 쪽과 더 깊은 내륙으로 팽창하면서 여러 종류의 토착 신들과 섞어지면서 아수라나 데와나 여러 신으로 분화하고, 그 둘에 포함할 수 없는 다른 신들이 많이 생겨 신을 악과 선의 부류로 나누는 일은 전체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아수라는 그 대비되는 짝 데와에 비해 악마라고 할 수 있는데, 원래는 아수라라고 해서 모두 다 악마였던 건 아니었고, 힌두교에서 시간이 가면서 악마로 자리를 잡습니다. 기독교의 사탄과 같은 개념의 신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아수라는 항상 데와와 대립하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둘은 항상 진영으로 나뉘어 싸우는데, 그 싸우는 양상을 보면, 재밌는 게, 어찌 보면, 아수라가 데와보다 더 정의로워 보이기도 하는데, 아수라는 융통성이 없을 정도로 항상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일을 해나가지만, 데와는 원칙보다는 융통성을 더 중시합니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데와는 협상하고 속된 말로 짬짜미하는 걸 잘 하는 데다가, 꼭 위기 시에는 비슈누나 쉬바 같은 절대 신에게 빌어 그들을 개입하게 만듭니다.
아수라의 패배 혹은 데와의 승리를 통해 고대 인도인이 가졌던 싸움에 대한 세계관을 살펴볼 수 있을 겁니다. 우선적으로 중요한 건, 그 어떤 옳음도 원칙으로만 흐르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메시지지요.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절대 신에게 모든 걸 다 맡기고, 호소하는 것이 승리의 근거라는 거지요. 그러면, 그 절대 신은 소위 말하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가 되는 겁니다. 즉, 아수라가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일 뿐, 절대 신이 개입하면, 그걸로 게임 끝이라는 뜻이지요. 인간 세상에서 평가하는 능력이라는 것, 군사력이네 지략이네 이념이네 하는 것들, 다 의미 없다, 오로지 주만 바라보고 그에게 의지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전형적인 종교의 메시지지요. 그 절대 신이 역할을 하는 것은, 데와 쪽이 우주 보편의 진리인 다르마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절대 신이란 바로 다르마를 지키고 그 기반 위에서 사회 질서를 세세토록 유지하게 하는 존재이니, 그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은 고려 대상이 전혀 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그 다르마라는 게 뭡니까? 이 연재 글 제5장, ‘세상은 불평등 하나니’에서 계속해서 말씀드렸던 바르나(카스트), 아슈라마, 남녀 등을 분별하여 그에 합당한 법을 지키게 하는 사회의 윤리,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지요. 상대 세력이 민주, 인권, 평등, 자유 등 그 어떤 좋은 이념을 들고나오고, 정당하고 바른 방편을 택하더라도 바르나-아슈라마-다르마 질서를 깨뜨리고자 하면, 절대 신은 용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싸움에서 아수라는 엄청난 힘으로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즉, 전통 질서를 깨뜨리는 쪽이니, 질 수밖에 없다는 거지요. 모든 싸움에는 다르마를 지키는 편이 승리한다, 그 이유는 우주의 절대 신 비슈누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개입하기 때문이라는 힌두교의 이념이 바탕에 깔려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든 사회에서 지키고 경계해야 하는 덕목은 모두 아수라가 지니는 특질로 신화에 나타나지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엄청난 고행을 참고 견디면서 끝내 이루어내고, 그에 대해 비슈누나 쉬바 혹은 브라흐마 같은 절대 신이 감동을 크게 받아 그에게 엄청난 축복 예컨대, 그 어떤 사람이나 짐승이나 죽일 수 없는 영원한 힘을 받는데, 그 힘을 믿고, 다르마를 거스르는 짓을 하여 절대 신의 분노를 사게 하는 게 그 신화의 보편 구조입니다. 그런 가운데 아수라는 오만하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내고, 거대한 욕망을 갖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반면, 데와는 절대 신 앞에 겸손하고, 신에게 제사나 예배를 잘 수행하고, 그것들을 통해 도움을 구하고, 함께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를 가진 존재로 묘사됩니다. 제 아무리 고행을 겪어내고, 엄청난 축복을 받았어도, 다르마를 지키지 않으려 하면 파멸로 간다는 메시지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힌두교가 생각하는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선은 사회 안에서 힘을 쌓고, 조직하는 일을 합니다. 절대적인 선이라는 건 없고 사회 안에서 주어진 역할에 따라 달라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르마 수호를 위하여 악의 역할을 담당하는 데와도 있고 그와 역의 관계의 아수라도 있지요. 중요한 건 다르마 속에서의 역할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기존의 사회 질서를 긍정하는 쪽이 힘을 더 많이 쌓고, 그들이 이기고 그들이 정의고 선이라는 겁니다. 결국, 선과 정의는 기독교에서와 같이 절대적인 게 아니고 상대적인 거지요.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잇는 것은 힌두교는 브라만 신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종교심을 배양시키는 겁니다. 그 종교심이란 브라만이 정한 종교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고, 지금의 우리가 추구하는 평등과 자유와 민주 같은 것은,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지요. 니체가 말하는 힘에 대한 의지와 그로 인해 만들고자 하는 인간 주체를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힌두교는 변화 위에 선 힘의 조직 대신 연민이나 자비를 베풂으로써 인민을 은혜, 피안, 구원, 복 등을 갈구하도록 하면서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삶을 적대시 하게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