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니 11. 여시아문 如是我聞
세상 사는 일에 가치를 두고, 물질과 정신 모든 면에서 복을 받고,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기원하는 대승 불교는 전형적인 기복 종교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종교가 기복의 성격을 띠는 게 저질인지 아닌지의 판단은 각자 알아서 하면, 될 테고, 아무튼 대승 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기복을 별로 부끄럽지 않아 하지요. 그러면서, 그 기복을 위해 필요한 모든 방편은 다 받아들였고요. 때로는 (자기에게) 악을 죽이기 위해 저주도 하고, 때로는 아들을 낳기 위해 백일 불공을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엄청난 규모의 의례를 국가적으로 지내 외적을 물리쳐달라고 기도회를 하기도 하지요. 그런 대승의 전통 가운데 특기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일부 밀교 계통의 경전이나 실용 목적의 의례용 기도문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화경』, 『유마경』, 『화엄경』, 『아미타경』 등 대부분 대승 경전은 모두 ‘여시아문’(如是我聞) 즉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는 겁니다.
‘여시아문’이란 무슨 뜻인가요? 이는 붓다 사후 붓다의 가르침을 처음으로 집대성하여 경전을 편찬할 때 그 작업을 주도했던 제자 아난다Ananda가 그 말이 본인의 해석이 아니고 스승이 말한바, 그대로라는 의미로 출처를 분명하게 밝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한 문구지요. 그건 그들이 비판한 힌두교의 방식과 결별한 겁니다. 당시 힌두교에서는 베다 이후에 만들어진 세계관, 사회적 행위나 체계도 모두 베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부회하는 전통이 강했습니다. 베다가 그만큼 절대적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베다 시대가 끝난 후 사회가 크게 바뀌어 그것을 반영하여 누군가가 자기의 의견을 펼치거나 사회적으로 베다 시대와 전혀 다른 체계나 문화를 만들더라도 그런 모든 것들이 애초에 베다에서 말해진 것이라고 부회를 하려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힌두교에서는 어떤 저자/편찬자가 누군지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자기 이름을 감춘 채 어떤 신이나 신적 존재가 전해주었다는 식으로 신성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지요. 그 대표적인 예가 인도 최고 권위의 법전인 《마누법전》의 이름입니다. 이 법전의 저자 혹은 편찬자는 ‘마누’가 아닙니다. ‘마누’라는 신적 존재가 내려준 말씀을 누군가 듣고 기억으로 전승했다는 의미입니다.
붓다는 몇 차례 말씀드렸듯이, 당시 힌두교에 반발하면서 출발했는데, 그 핵심은 베다의 세계관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었지요. 그 가운데 핵심은 영원한 본질, 변하지 않는 절대 존재인 아뜨만이라는 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건 억겁의 인연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 거지요. 전자는 한자어로 무아(無我) - 여기에서 ‘我’는 ‘아뜨만’이지, ‘나’가 아니라고 몇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라 음역하고 후자는 ‘연기’라고 훈역한 개념을 깨달은 진리로 설파한 게 붓다였으니, 붓다와 그 제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힌두교에서와 같이 베다에 부화하거나 어떤 신이나 신선 같은 존재가 전해줬다고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스승이 분명히 이렇게 말했고, 나는 이렇게 들었다, 라고 말을 한 것이지요. 그런데 500년 정도가 지나면서, 그 스승의 가르침과 전혀 다른 대승불교가 나와, 세상은 더 이상 고통도 아니고, 깨달음을 추구할 필요도 없고, 세상 안에서 살면서 복을 기원하고, 서로 베풀고 도와가며 잘 먹고, 잘 사는 행복한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게 진리라고 주장하는 세계관이 만들었지요. 그러니 그런 세계관은 붓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그들 나름의 의견일 텐데, 그 내용을 붓다에게서 들은 것, 여시아문이라는 예전의 형식을 따르며 펼쳤습니다.
왜 이런 왜곡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의외로 단순한 논리에서 출발합니다. 붓다가 찾은 탈세상과 열반, 해탈이라는 세계관은 더는 따를 필요가 없고, 이 세상에서 복 받으면서 잘 사는 길을 가는 게 더 옳은 길인데, 그 길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이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야 더 좋은 세상이 오는데, 곧이, 곧대로 하면 그 뜻이 전달되지 않고 널리 퍼져 세상이 교화되지 않더라는 거지요. 그들은 불교에 관심이 많지만, 여전히 힌두교 사회 체계와 문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힌두교 방식으로 뜻을 전달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 생각해서 힌두교적 방식을 따르는 것이지요. 사실이 아닌 거짓일지라도, 그것이 옳게 쓰여 나와 남에게 이롭게 된다면 거짓을 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게 속 깊은 방편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작은 수단은 바꾸거나 거짓으로 취하는 길, 그 길을 당신이라면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작은 길이 삿되면 큰길은 삿되지 않을 수 없다고 근본주의적으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처음처럼’ 가다가 사람들 다 떨어져 나가는 걸 감수하시겠습니까? 대승 불교는 이런 식의 방편을 널리 쓰면서 결국 힌두교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고, 그러면서 독자성을 잃고 힌두교에 흡수되었지요. 하지만, 이를 달리 보면, 대승 불교는 인도에서는 사라졌지만, 세상에 널리 받아들여져 인류 문화의 주요 근간이 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이 두 방편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