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니 10. 무드라 Mudra 手印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굳이 출가하지 않고 부모 처자식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뭔가를 바라고 이룰 수 있는 길이 교리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가 있고, 그것들을 위한 길이 아주 다양하게 펼쳐져 있으니, 그 바람을 들어주는 신으로서의 보살이 곳곳에 즐비할 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 보살행을 실천함으로써 ‘성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승의 길을 가는 불자는 스스로 보살로서 주변의 뭇 중생을 돕기 위해 여러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행위로 존중받았지요. 굳이 꼭 여섯 가지 바라밀이나 열 가지 바라밀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남에게 베푸는 포교 행위, 법문 강론, 의례, 진리의 언어, 생활 속에서 참고 노력하는 일, 함께 하는 연대 등이 모두 권고되는 방편이 되었습니다.


이런 여러 방편 가운데 보시, 참고 노력함 혹은 연대 등 어떤 행위를 직접적으로 하는 방편도 있겠지만, 불교 특유의 그 진리의 언어를 추상적으로 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이 수인(手印)이라 번역한 무드라(mudra)입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진리를 직접 말로 분명하게 설명하면서 전하는 종교 방식도 있었지만, 은밀히 상징적으로 전하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이를 밀교라고 하는데, 딴뜨라(tantra)라고 하는 – 나중에 독립적으로 다룰 겁니다. - 한 비밀스러운 지식 체계를 통해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주문이라든가, 진언이라든가 기괴한 의례라든가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바람을 희구하는 거지요. 그 가운데 하나가 무드라입니다. 손가락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어 그것으로 뭔가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불상을 보면 붓다가 손가락을 오므리거나 원을 만들거나 땅을, 가리키거나 하는 사인을 하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왜 직접 말로 하지 않고 무드라로 말하는 걸까요?


힌두교와 불교에서 무드라는 단순한 손짓이나 몸짓이 아닙니다. 단순히 말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분명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정신적 혹은 영적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공유하는 상징이지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이치라든가,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이치라든가, 각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이치라든가 하는 불교 고유의 세계관을 직접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깨달음에 이른 석가모니 붓다를 상으로 새긴 본존불상에 주로 표현된 ‘항마’(降魔)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글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를 단 하나의 손가락 제스쳐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항마촉지인이라는 무드라지요. 공(空), 자비, 선정 등과 같이 직설적 언어로 완전하게 설명하기 어렵거나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때, 손의 자세를 통해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스스로 수행에 들어갈 때, 그런 자세를 취하면서 하는 건데, 그 모습을 불상으로 표현하면, 그 모습에서 그걸 공유하기도 하는 것이고요. 제가 추상화를 그리는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어떤 개념을 나누고 싶은데, 아무리 직접적으로 설명해도 그 추상적 개념을 똑같이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술을 앞에 놓고 그 그림을 대하는 사람이 자기 스스로 느끼기를 바라는 의미로 그걸 그립니다. 그래서 추상화를 해석하는 길은 각자 보는 눈과 느낌에 따라 달라지지요. 즉, 무드라는 ‘말하는 자’ 대신 '보는 자'가 스스로 더 깊이 있게 어떤 메시지를 읽어내도록 하는 방편인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불상이나 탑, 불화도 중생이 쉽게 붓다를 떠올리고 성불의 보살행을 실천하게 모든 마음을 모으게 하는 방편이지요. 이러한 방편의 개념이 있었기에 힌두교나 불교나 모두 상(像)이나 그림이나 연극과 같은 여러 예술이 크게 꽃피웁니다. 모두 삶 속에서 여러 가지를 바라고 소망하면서 공동체 안에서의 바람직한 관계 행위를 해나가는 것을 목표로 사는 방편을 표현하는 것들이지요. 대승 불교가 개인 수행이 아닌 공동체 내에서 실천을 통해 교화하는 것을 목표로 두었기 때문에 이런 예술이 방편으로 널리 자리 잡게 된 것이지요. 불교에서 예술은 단순한 노동이나 놀이 혹은 커뮤니케이션이 아니고 중생이 법을 쉽게 이해하고 보살행과 성불에 나아가도록 돕는 수단, 즉 방편으로 여겨졌습니다. 본래 초기 불교에는 방편이 중요하지 않았기에, 붓다의 형상을 표현하여 뭔가를 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것으로 당시 종교의 궁극인 깨달음을 완수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대승 불교에서는 교리가 바뀌면서, 여러 가지 세속 삶의 목표가 이루어지도록 가르치는 방편으로 불상을 조성할 필요가 생겨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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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하지만, 불교에서 중생이 모시는 그 상은 그런 숭배의 대상이 아니고, 삶에서의 구복과 보살행이라는 대승의 법을 쉽게 체득하게 하는 매개체로 사용된 것이지요. 물론 그러다보니 단순히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왕왕 잇겠지만, 그 숭배가 꼭 부정적인 것이라 할 수만은 없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상은 여러 예술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미적 감상의 대상도 아니고 숭배물도 아니고, 수행과 교화의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죠. 그림이나 건축이나 조각이 하나의 법문이라는 것이라면, 그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불화는 글을 모르는 중생을 위한 보이는 법문이고, 영산재 같은 의례는 중생과 부처·보살이 만나도록 하는 매체가 됩니다. 글을 몰라도 노래, 그림, 춤 등이 장치를 통해 불법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지요. 그 안에서 무드라는 그것들을 구성하는 언어고요. 모두 보살행을 위한 대승 차원의 방편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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