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VI.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니 9. 우빠야Upaya 방편
우리 일상에는 불교에서 나와 널리 쓰인 말들이 꽤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청자(聽者)에 따라 설법을 달리하라, 했다는 말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거지요. [법화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집에 불이 났는데, 아이들이 노는데 정신이 팔려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염소 수레, 사슴 수레, 황소 수레 장난감이 있으니 빨리 나오라고 거짓말하여 그 아이들을 구해냈다는 겁니다. 겉의 사실fact로는 거짓이지만, 중심 의미로는 참이지요. 이를 불교에서는 우빠야upaya 방편이라고 합니다. ‘우빠야’는 문자 그대로 편리한 수단 혹은 적절한 방법을 뜻합니다. 즉, 사람들의 능력이나 성향 등 처한 상황에 맞춰 뭔가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취하는 다양한 수단을 말하지요. 학식이 깊고 논리적인 사람에게는 심오한 교리나 수행법을 제시하고 담론 속에서 그 이치를 논하면서 스스로 받아들이게 하는 게 좋겠지만, 보통 사람 대부분에게는 그 깊고 어려운 내용을 쉬운 비유 이야기로 들려주는 게 훨씬 좋지요. 비유는 비유일 뿐, 100퍼센트 똑같을 수 없으니, 그 비유 안에 녹아있는 중심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시비를 걸면, 또 그에 맞는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야 할 테고요. 그러니 그 방편이란 듣는 사람에 따라 바뀌기도 하지만, 말하는 사람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과장이 더 과장을 낳고, 또 과장을 낳다가 결국, 의미가 바뀔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하겠지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이 임하여서 직접 말하는 것이니, 일점일획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격이지요. 불교에서는 거짓말도 상황에 따라 정당한 방편으로 허용됩니다. 그러니 엄밀하게 말해서는 거짓이라는 건 불교에서는 외형으로는 파악하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니, 융통성이 크고 맥락적이지요. 기독교는 상대적으로 그 융통성이 훨씬 적고, 더 텍스트 원칙적이고요.
붓다가 설파한 출가와 깨달음의 초기 불교가 약 500년 정도가 지나면서 서서히 변하고 변하면서 대중화된 대승불교가 섰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대승불교에 와서 불교는 깨달음 외에 지혜로운 삶에 이르기 위해서 두 가지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봅니다. 그 첫째가 지혜이고 둘째가 방편입니다. 지혜는 - 앞에서 독립 글로 설명했습니다만 – 산스끄리뜨 원어로 쁘라쟈(prajna)라고 하는 어휘인데, 한자어로는 뜻 없는 음을 번역해 반야(般若)라고 씁니다. 이 지혜는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나 연기의 이치 등 우주와 세계의 궁극적 진리 혹은 그것이 세상 안에서 작용하는 이치를 뚫어보거나 이해하는 통찰을 말하는 것이고, 방편은 그 진리 혹은 이치를 현실에 맞게 실천하고 나아가 중생에게 복을 주는 즉 그들을 이롭게 하는 구체적 수단과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초기 불교에서는 방편은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부여받지 못했는데,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지혜만 있고 방편이 없으면, 혼자만의 깨달음일 뿐이다, 라고 출가와 깨달음이 상대적으로 평가절하되고, 상대적으로 방편이 중요하게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방편만 있고 지혜가 없으면, 겉모습만의 자비가 되니, 그것은 위험이라고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는 지혜와 방편을 한 쌍으로 강조하였으니, 실제로는 방편의 중요성이 매우 크게 성장한 거지요. 그러다 보니,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 보살은 지혜로 진리를 찾았으나, (스스로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고) 중생을 구하는 여러 방편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이지요.
방편은, 요즘 말로 하면, 메시지가 아니고 메신저다, 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야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중요하다는 거지요. 오래전에 제가 아프가니스탄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에서 만난 기독교 선교사이면서 반전 운동가인 어떤 한 분이 제게 말한 바, 선교는 two ‘W’인데 하나는 Words이고 또 하나는 Works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가난하고 전쟁 중인 그 사람들에게 행동으로, 함께 할 뿐, 단 한 번도 바이블의 구절을 읊는다거나 같이 읽자는 걸 요구하지 않았다고 합디다. 그것이 바로 그가 택한 방편이지요. 다른 종교에 대한 적개심이 아주 강한 이슬람 사회 그것도 내전이 20년 넘게 지속되어 온 그 사회에서 기독교 선교사로서 그가 택할 수 있는 방편으로는 매우 현명한 걸로 봤습니다. 기독교가 불교보다는 방편이 차지하는 의미가 그리 크지 않은데도 그가 참 현명한 길을 택했다고 생각했었지요. 반면에 기독교 아닌 불교가 꽉 막힌, 방편의 의미를 잘 살리지 못한 근본주의적인 태도를 하는 예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요한 건 종교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겠지요.
최근 뉴진 스님이란 예명으로 큰 히트를 친 개그맨 한 분이 있지요. 그는 승려가 아니고, 승복 비슷하게 입고 예능을 하는 연예인인데,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종단에 속한 승려가 포교의 한 방편으로 새로운 디지털 시대의 문화 방식을 택한 사례가 늘고 있답니다. 온라인 법회를 갖거나 메타버스로 법당을 만들고, 시·공간 제약 없이 참여할 수 있는 비대면 법회를 운영하거나 팟캐스트나 유튜브로 법문을 전하는데, 그것도 긴 법문 대신 짧게, 어떤 경우에는 밈 같은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새로운 방편을 이용한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조계종에서 이러한 새로운 젊은 디지털 문화에 적극적으로 앞장선다고 하니, 일부겠지만, 불교 특유의 방편에 대한 유연성이 덧보입니다. 믈론 그러다가 배가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고요. 그건 전혀 다른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