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I. 신들이 노는 세계. 2. 마라 Mara 魔羅


신을 중심으로 볼 때, 힌두교는 다신교입니다. 불교 또한 처음 출발했을 때와는 달리 힌두교의 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름과 형태만 달라졌을 뿐, 실질적 기능은 힌두교와 다를 바 없는 다신교라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신 가운데 원래는 신이 아닌 어떤 정신이나 영적 힘인데, 시간이 가면서 의인화된 후 신 비슷하게 여겨지는 존재가 있습니다. 이번 글의 주제인 마라mara라는 겁니다. 마라는 한자어로 보통 ‘마(魔)’라고 뜻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마라(魔羅)’라고 음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두 경우 다 마(魔)라고 하는 악마의 개념을 사용한 데다가, ‘악마’를 기독교를 통해 이해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람들은 마라를 악신의 일종으로 생각하곤 하지요. 이 마라의 개념은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할 때 마귀가 나타나 빵·권력·하나님의 시험을 들며 예수를 유혹하며 기도를 방해한 사건과 비슷합니다. 예수를 방해한 마귀는,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격신이지요. 악의 실체고요. 반면, 불교의 마라는 붓다 그 자신 내부 안에 존재한 번뇌 같은 것입니다.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힘의 상징이지요.


마라는 석가모니가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에 보리수 밑에서 수행할 때, 그 수행을 방해하는 존재입니다. 초기 불교 경전에는 붓다가 깨달음 직전에 마라가 나타나 여러 차례로 방해하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마라는 그 어휘의 원래 뜻이 가르치듯, 가장 원초적인 의미는 죽음입니다. 그 죽음이라는 건,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 즉 윤회의 다른 말이지요. 구체적으로는 집착을 비롯한 여러 번뇌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두려움, 욕망, 의심과 같은 인간적 속성을 말하는 거지요. 좀 더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무명(無明)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대승불교에 가서는 그 서사가 아주 화려하게 각색되면서 신 비슷한 존재로 취급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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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석가모니를 위협하면서, 화살을 쏘고, 창을 던졌는데, 석가모니가 평정심을 잃지 않으니 이내 꽃으로 변해 떨어졌다고 합니다. 또 마라는 천둥이나 번개와 같은 괴물 형상으로 공포를 일으켜 깨달음을 포기하게 하려 했는데 그것 또한 먹히지 않았답니다. 그러자, 마라는 세 명의 아름다운 자기 딸을 보내, 석가모니를 유혹했으니, 그 여인네들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몸을 써가면서 비비고 했겠지요. 그렇지만, 그것도 석가모니를 흔들지 못하고 실패하지요. 그러자, 마지막 수단인 권위 혹은 자격의 합당함으로 더 강하게 압박합니다. 마라가 석가모니에게 묻기를, “누가 너를 이 자리의 주인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냐? 이 땅은 내 것이다!”라고 논리를 들이대는 것이지요. 붓다가 깨달음을 얻으려 하는 수행을 근거 없는 혹은 정당성 없는 시도로 몰아붙이려는 것이지요. 네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런 수행을 하려는 거냐고 논쟁을 붙이는 겁니다. 그러자, 붓다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말하기를, 땅이 바로 증인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땅이 흔들리며 석가모니를 지지하자 마라는 최종적으로 패하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지요.


마라의 유혹은 상징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게 아니고. 사람들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상징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 상징이 말하려 하는 건 뭘까요? 군대와 여인을 통한 위협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성에 대한 욕망을 상징합니다. 붓다 혹은 초기 불교도들이 생각한 가장 원초적인 번뇌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욕망과 집착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위협을 이겨냈다는 것은, 윤회 즉 죽음과 집착의 결과로부터 해탈한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세 번째 압박은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마라는 석가모니의 자격을 물었지요. 깨달음이라는 것을 시도하는 석가모니의 자격이 합당하냐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그 문제는 번뇌와 죽음의 영역 안에 속해 있고, 누구든 그 죽음을 가져오는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가 다 자기 ‘나와바리’의 일이니, 석가모니를 자기 ‘나와바리’에서 다른 것을 시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를 두고 석가모니는 땅이 증거라고 대응하는 논리를 들어 반박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땅이 알고 하늘이 아는 일이다.”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자신이 쌓아온 보시와 수행을 통해 자신의 자격이 합당하다는 거지요. 당시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인 땅이 증거라고 하면 그걸로 충분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깨달음의 자격은 브라만 전통이 부여하는 권위로 얻는 게 아니라, 스스로 쌓아온 진실한 수행에서 비롯된다는 선언인 셈이지요.


그런데 마라에 관해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라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몇 번 나타나 계속해서 수행을 방해합니다. 그 가운데 압권은 마라가 붓다에게 이제, 다 이루었으니, 그만 열반의 세계에 들라고, 즉 죽어 해탈하라고 권유하는 것일 겁니다. 마라의 그 유혹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요? 번뇌라는 건, 인간인 이상,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나타나고 또 사라지고 또 나타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삶에서 우리가 접하는 어려움이란 극복 가능한 것이지,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저는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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