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VII. 신들이 노는 세계. 4. 아와따라 Avatara 化身


앞의 글에서 이슈와라는 절대 신인데, 그것은 궁극이자 변하지 않는 본질, 절대 존재 그 자체라서 파악할 수도 없고, 형언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인 브라흐만과 같은 것이라 했습니다. 브라흐만이 인격신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절대 지존인 비슈누이고 쉬바라는 겁니다. 힌두 신학자들은 그렇게 본다는 것이지요. 두 절대 신 가운데 특히 비슈누 전통에서 발달한 개념으로 아와따라avatara라는 게 있는데,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모습을 달리하여 나타납니다. 잠깐 기독교의 논리를 빌어 설명하면,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빛과 같은 존재인데, 형상이 없으니 그대로 나타나 봤자, 사람들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니 사람들이 그를 느끼고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사람의 형상을 띄고 나타났다, 그가 바로 예수라는 개념이 여러 차례 [바이블]에 나옵니다. 이를 두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 즉 인간의 몸이 된 존재라고 합니다. 힌두교의 아와따라는 이 개념과 거의 똑같습니다. 영화 [아바타]를 생각해보면 될 겁니다. 어느 별을 정복하기 위해 인간의 본체는 본부에 뉘어놓고, 일종의 화신을 다른 행성으로 내려보내지요. 그것이 힌두교의 아와따라에서 온 개념, 아바타입니다. 산스끄리뜨 어휘 ‘아와따라’는 ‘내려옴’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어휘로 비슈누 신이 사람 세상에 동물이나 반인반수 혹은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는 화신을 의미합니다. 시간 단위가 영겁 무한대이니 아와따라도 무수히 많을 겁니다. 그렇지만, 범 인도적으로 통용되는 힌두교 전통만 치면 현재까지 아홉 명의 아와따라가 왔고, 앞으로 곧 올 아와따라가 한 명이 있으니 모두 열이지요. 물론, 아와따라가 비슈누 외의 다른 신에게도 적용될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신의 아와따라는 아주 드물고 실제로는 거의 비슈누의 아와따라만 있습니다.


그러면 절대 신 비슈누는 왜 아와따라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일까요? 그 신학적 논리에 의하면, 비슈누는 세계를 구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일을 하러 내려오지요. 맨 첫 장에서 말씀드렸듯, 세계는 창조가 이루어진 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주기가 다 끝나 파멸의 주기가 시작되지요. 아니면, 세계 안에서 신이 세운 질서가 무너지고, 도덕이 타락해 혼란에 빠질 때가 있지요. 그 질서를 회복하고 인간을 구하기 위해, 비슈누가 그 위기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와따라’라는 절대 신의 화신은 브라만 신학자가 설정해놓은 ‘다르마’라는 보편 법이 도전받을 때, 절대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악을 징벌하니, 법과 도덕을 잘 지키라는 메시지의 신학적 장치지요. 전통에 대한 도전과 변화 요구의 목소리를 죽이려는 브라만 사제가 고안한 장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 사학자는 아와따라가 나오는 신화를 통해 그 신학자가 말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해석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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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신화에 어떤 왕이 자신이 가진 엄청난 권력을 믿고 자만하여 브라만의 영역을 침범하였는데, 비슈누가 난쟁이로 나타나 그 왕을 징벌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왕의 권한이 강력해지는 역사의 어느 기간에 브라만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브라만을 공손하게 모시라는 메시지를 담은 신화지요. 예컨대 비슈누의 화신인 나라싱하Narasimha라는 아와따라는 반은 사자고 반은 인간의 모습을 띤 비슈누의 아와따라입니다. 어떤 왕이 엄청난 고행을 수행하여 브라흐마 신을 감동시켰고, 그리하여 브라흐마 신이 그에게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나 짐승도 그를 멸하지 못한다는 축복을 받았는데, 그러자 매우 자만해졌고, 그의 탈선이 도를 넘어, 결국에 비슈누가 반인반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를 죽였다는 신화입니다. 한 마디로 우주를 호령하는 큰 권력일지라도 비슈누를 숭배하지 않으면, 즉 브라만을 모시지 않으면 파멸당한다는 메시지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마하바라따] 신화에 나타난 끄리슈나가 있습니다. 끄리슈나는 혈육끼리 벌이는 살생을 하지 말라는 전통을 구시대의 도덕으로 간주하여, 이제 새 시대에는 그런 혈연관계의 도덕에서 벗어나 다르마에 의한 도덕 체계를 새롭고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끄리슈나의 입을 통해, 주장을 하지요. 또 다른 신화 [라마야나]는 그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초점을 맞추었지요. 왕이란 적장자가 세습하는 것이 비슈누의 화신 라마의 뜻이고, 그 적장자는 아무리 큰 위기가 생기더라도 그 위기를 극복한다는 강력한 교훈을 메시지로 전하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설사 잘못된 것일지라도 아버지의 말에는 반드시 순종하고, 아우는 형을 배신하지 않으며, 남편은 아내를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는 다르마 도덕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아홉 번째 화신으로 붓다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비슈누가 잘못된 다르마를 앞세운 붓다로 나타나 사람들이 얼마나 붓다에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시험해 보려고 나타난 거지요. 이는 불교가 엄청나게 흥성하여 브라만 세력이 큰 타격을 받았을 때 만들어진 신화겠지요.


아와따라는 지금도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자신이 비슈누의 아와따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실제로 상당히 존재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내려온다고 하지요. 세상이 말세라면서, 도덕을 다시 세워야 한다면서 말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그 말세는 뭘까요? 전통 사회의 도덕 즉 다르마를 새롭게 사회 변화에 맞게 바꾸려는 즉 카스트 구조를 폐하거나, 남녀 차별을 폐하거나 하는 움직임이 강한 시대입니다. 아와따라는 사회가 봉건 질서에 뿌리를 내리고 변화, 변혁을 꾀하지 못하게 하는 힌두교의 장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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