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숭배하는 건 그 위계의 사다리 최상의 위치하는 절대 지존만을 숭배하는 건 아니다. 공무원에게 청탁하고자 할 때 장관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담당 과장에게 하는 것이 사람들 세계의 일인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 세계의 효용성과 권력과의 관계가 신들의 세계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 신들의 세계는 사람들의 세계요, 그곳은 사람들이 욕망을 소비하는 곳이라, 그 안에 있는 이야기는 모두 사람들의 이야기다. 인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의지하는 신 가운데 하나는 저 원숭이 신 하누만Hanuman이다. 위대한 하나님 비슈누의 화신 라마Rama를 주인으로 모시고 악마를 물리치는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신이다. 그 하누만 신상이 성스러운 강 수변 광장 한 가운데 거대한 크기로 서 있다. 양 쪽에 부조로 새겨 이쪽에서도 발에 절을 하고, 저쪽에서도 발에 절을 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하누만 신상에게 절을 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그를 쳐다보기만이라도 하는 사람은 백이면 백, 지금 이 사진의 좌우 90도 각도로 틀어 선 위치에서 볼 것이다. 그것이 정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것은 무엇이든 사람이 세워놓은 것이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달리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하려 하기 때문이다. 신은 스스로 존재한 존재이든 사람들이 만들어낸 존재이든 어떤 절대자가 창조한 존재이든 영겁의 세월 속에 맞춰 생겨난 존재이든 간에 인간을 돕고, 인간을 세우고,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좋은 곳이 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인도에서 힌두교의 신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그들은 세계를 가르고, 우리와 너희를 가르고, 처단하는 자와 처단당해야 할 자로 나뉘는 전선의 맨 앞에 선다. 그 신 가운데 가장 앞에 선 신이 저 하누만 신이다. 신화에서 위대한 인간을 도와 세계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낸 그 위대한 조력의 신이 힌두 광신자들에 의해 무슬림을 처죽이는 도살자의 상징으로 소환되어 있다. 일부 정치인의 농간이라지만,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악의 정치에 환호하고 그 만들어진 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하누만 신의 깃발 아래 무슬림 여인을 강간하고 아이들 머리를 돌로 짓이긴다. 그들이 믿는 하누만 신은 이쪽에 있는가, 저쪽에 있는가?
세계는 원래 하나다. 선과 악이 하나이고, 낮과 밤이 하나이고, 물질과 정신이 하나이다. 그 본질이 어떤 유한한 현상으로 나타나 둘로 보일 뿐이다. 그 본질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보는 이의 눈에 따라 봄이 되기도 하고 여름과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기도 한다. 물 흐르듯. 천변만화하지만 결국은 하나다. 대상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의意와 지志로 바라보는 것이다. 선이 악이고 악이 선으로 섞인 이 카오스의 세계를 어떻게 그저 바라보면서 단촐히 담아낼 수 있을까? 카메라를 들 때는 늘 하는 재현에 대한 고민이다. 우주가 물 한 방울에서 시작되고, 이슬 한 방울에 우주가 담긴다는 이치를 알아야 그렇게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걸 모르고 보면, 그저 보이는 것은 물 한 방울에 이슬 한 방울 뿐이다. 문제는 저 실타래 같이 얽힌 저 카오스의 세계를 어떤 이미지로 보여줄 것인가, 일 텐데, 카오스의 한 단면을 끊어 만든 그 한 장의 사진 아에서 그 이어진 세계를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의 세계를 정지시켜 사진이라는 한 단면으로 담아야 한다면, 카메라를 든 내 뜻으로 경계도 짓고, 위치도 지워야 한다. 대상을 달리 선택하니 재현된 이미지가 달리 나타나지만, 사진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동일하다.
저 하누만 신상을 중심으로 조성된 성스러운 강 수변 광장은 사람들이 모여 목욕 의례를 하는 곳이다. 그곳에 모셔진 저 하누만 신상의 모습이 특이하다는 데서 실마리를 찾아 본다. 부조 형태로 되어 있는데, 앞 뒤 양쪽에 신상이 모두 새겨져 있으니 앞뒤가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 신상을 사진 프레임 안에 위치시켜 내 이야기를 해보자. 신상으로 세계를 나눈다. 그러자 세계가 둘로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멀쩡한 하나일 텐데 ... 이런 재현으로 하는 사유의 놀이는 세계를 보는 나 자신의 위치를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로 엉켜 붙은 카오스의 세계에서 살아가려면 세상과 거리를 어떻게 두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그런 위치 지우기를 사유해 보는 것이다. 내가 세계를 파악하는 것은 항상 동일하다. 인간에게 악과 선은 섞여 존재한다는 것. 둘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촛불이 초의 기름과 심지가 섞이면서 불로 피어오르듯, 인간에게 선과 악은 서로 섞이면서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나타난다. 세계에 나타나는 모습은 그 둘이 어떻게 조합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현상이란 생성되는 것이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악이라 해서 악의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니고 선이라 해서 선의 얼굴을 하는 것도 아니다.
입에서 인간으로 할 수 없는 악의 언어가 배설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면 천사의 목소리를 한 노래도 그 입에서 나온다. 그 행위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악의 저주를 퍼붓는 이가 그것이 악이라는 걸 모른다는 사실이다. 다른 이에게 벌어지는 불행은 나에게 상관없는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힘들지만, 그건 당신의 운명이고, 나는 그냥 나만 행복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을 열심히 이주시켰을 뿐이다. 더욱이 나는 칸트의 정언명령 즉, "자신의 의지의 원칙이 항상 일반적인 법의 원칙이 되게 하라"는 근거에 바탕을 두고 충실하게 행동했을 뿐이다. 만일 내가 국가의 명령을 받지 않고, 그런 일을 자행했다면 양심의 가책과 책임을 지겠으나, 나는 단지 국가의 명령을 수행했기에 나는 무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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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죄는 사유의 불능성, 그 중에서도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다."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인도, 마하라슈뜨라, 나시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