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를 찾았다. 간디가 지상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뗀 곳. 무슬림 혐오자, 힌두 광신도의 총탄에 숨을 거둔 자리에 세운 박물관이다. 세계사에서 간디만큼 조심스럽게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렇겠지만, 간디만큼 신화로 덮여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마치 예수나 붓다가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행적이 제자들에 의해 관심을 갖지 못해 기록으로 많이 남지 않은 것과 비슷하게 그의 인간적 모습을 다면적으로 평가하기를 꺼려한다. 한국 사람들 같이 이 세상 그 누구도 도마에 올려놓으면 가차 없이 난도질을 해대는 극단적 평등주의 문화에서 산 사람들은 간디를 성인 시 하는 그들의 시각이 매우 부담스럽고 조심스럽다. 그가 성인이라 한들, 그 또한 역사에서 공을 쌓았겠지만, 그만큼 과도 쌓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무슨 특별난 것이 있어서 누구나 겪을 과오를 안 겪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또한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이런 시각을 사진으로 재현하고 싶었다. 그가 가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그에 대한 무한 비판을 섞을 수 없는 그 성역에 대한 시선을 재현해보고 싶었다. 글로는 쓸 수 있겠지만, 그것을 사진으로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박물관을 둘러보는 순간, 누군가가 그를 그린 거친 연필 소묘가 확 눈에 들어온다. 유리로 가려진 전시 공간 안에 모셔진 것. 그 자유로운 연필 놀림이 틀에 갇혀 있어서 잘 어울리지 않다. 카메라를 가까이 들이대니 빛이 반사되어 난데없는 그림자들이 난무한다. 눈은 그것들의 실체를 분간할 수 있으나 카메라는 그렇지를 못한다. 있는 그대로만 보여주는 기계라서 그렇다. 마치 낙인을 찍은 듯한 어떤 희한한 반사도 만들어지고, 마치 큰 붓으로 획을 하나 그어버린 것 같은 자국도 만들어지고, 빛이 강렬하게 들어와 영혼이 빨려 들어 가버린 듯한 느낌마저 받는다.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의 느낌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유한하다. 영웅이라고 숭앙받는 그 또한 한 인간일 수밖에 없기에, 그 또한 유한하다. 그가 영웅담에 그려진 것처럼 그가 그렇게 자율적이고 초월적이고 절대 고독의 존재는 아니다. 그 어떤 사람도 모든 것에서 이기심을 초월할 수도 없고, 잘못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만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그를 제어하고, 양육하고, 갈등을 일으키게 하고, 영감을 주고받는 사회 속에서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나갈 수 있다. 역사로부터 초월한 신으로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에 의존하고 역사에 빚지지 않는 사람, 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실제 존재한 사람이 아니다. 모두 만들어진 가상 존재다. 간디 또한 그렇다. 그가 보여준 소박함이나 시골 생활이나 욕망 절제의 삶은 분명 본받을 만한 것이지만, 그가 보여준 낮은 사람들에 대한 헌신과 희생만이 고귀한 사랑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의 사랑은 확실히 고집스럽고, 이기적이며, 집착적이다. 정치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이중적이고, 아니 다면적이고 모순적인 모습이 인간 간디의 본 모습이다.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대변되는 어떤 특질 하나가 아니다. 간디 또한 그렇게 하나의 특질로 표상되지 않는,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인간의 바닥에서 신의 제단으로 올린다. 그를 제단에 올려 다른 사람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한다. 그를 부인하고 모독하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 간디가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이다. 그 폭력은 그를 이용하여 거대 역사를 이루려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기획일 뿐이다. 그 기획이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그것은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래서 그런 기획은 사람들에게 패배감과 상실감을 줄 뿐이다. 사소하고 하찮은 문제와 시험을 무시하고 가는 거대한 길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다. 성인은 스펙타클로 존재하지 않는다. 성인이 진정 성인이라면 우리 곁에서 좌절하고, 눈물 짓고, 작은 걸음 하나 옮기는데 온갖 힘을 다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리영희 《우상과 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