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18

by 이광수

누군가가 남긴 말 한 마디가 철칙처럼 굳어져 버린 경우가 있다. 매그넘 소속 다큐멘터리 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가 남긴 말, 당신 사진이 마음에 안 들면 대상에 더 가까이 붙으라는 그 말이 바로 그런 것 가운데 하나다. 틀렸다. 그에게는 맞지만, 그것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버트 카파 같이 사진을 찍을 경우에는, 그럴 수 있다. 치열한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면 꼭 카파가 의미하는 바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방법론적으로도 그 사건이나 주인공에 대해 더욱 가까이 붙어야 좋은 기록이 나온다. 인류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라포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진이 아닌 좀 더 먼 관계를 찍고 싶은 경우도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시인 정현종이 그리는 그런 세계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 부유하는 그 섬을 사진으로, 시로 쓰려 해도 저토록 붙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거리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것이 풍경이든 풍경이 아니든 간에 사람을 찍는 것이다. 거리 사진에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도 그건 사람 사진이고, 그곳에 사람이 점처럼 찍혀 있어도 그것 또한 사람 사진이다. 그것은 사람 사는 세계가 갖는 피할 수 없는 속성, 사람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으나 그 사이에 항상 섬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노래한 바,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고, 그 섬에 가보고 싶은 그 섬 말이다. 가보고 싶으나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섬을 사진으로 재현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 난, 사람을 은닉시키거나 멀리 떨어지는 방식을 택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병자는 건강한 사람이 거리낌 없이 거니는 저 안개에 둘러싸인 편안하고 따뜻한 세계를 경멸과 함께 상기한다, 라고. 소름끼치는 눈이다. 도덕으로부터 벗어나 실제로 죽음 앞에까지 가본 질병의 고통을 당해본 몸에서 나온 처절한 철학이다. 이를 역의 경우로 생각해 보는 것 또한 타당하다. 건강한 사람이 병자가 보는 저 불안하고 흔들리며 파괴적인 세계를 따르고, 숭앙하며, 생각의 토대로 삼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이다. 건강한 사람이 병자의 세계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소화할 수 있다면, 결국 그는 병자가 되는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라는 방식의 세계관을 가져 보는 것, 바로 그곳에서 세상을 보는 눈이 자란다.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부르주아는 부르주아대로 사는 방식이 제대로 된 눈이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도덕과 원칙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지 말고, 시혜의 차원으로 내려주는 개혁의 기수로 서지 말고, 정해진 단일성의 신화 안으로 가지 말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가는 그 세계가 옳은 거 아니냐는 판단 말이다.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노동자가 자본의 편에 서는 그 비굴함이나 나 같은 부르주아가 그 노동자 편에 선다고 의지를 보이는 건 일종의 역겨움이 아닐까. 도덕이자 위선이 아닐까. 나로선, 내가 노동자가 되지 않는 한, 그건 위선이다. 이런 걸 어떻게 사진으로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불교 성지에 태국의 승려들이 순례를 왔다. 모두 그 자리에 앉더니 독송을 한다. 머리 위로 실이 길게 서로서로를 잇는다. 인드라망이다. 아침 이슬 한 방울에 인연계의 모든 존재들이 다 비추이는 그 인드라망 말이다. 그 실을 찍고 싶었다. 중으로 표상되는 저 우매한 존재들 사이를 이어주는 실이 내 눈에 들어온다. 중 한 사람 곁으로 바짝 붙었다. 의례가 갖는 비(非)본질성에 대해 재현하고 싶어졌다. 저이는 내 카메라 질 때문에 자신이 하는 묵상에 방해를 받았을까? 나는 내 목적을 위해 무례함을 저지른 것일까? 깨달음을 위해 가는 여정에 온통 장애물로 가득 찬 세계라서 그는 괜찮을 것인가? 이런 행위의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일까, 그가 하는 것일까? 처음 실을 찍고 싶어서 붙은 나는 결국 종교와 의례에 대한 생각으로 흘러갔다.


사진은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를 드러내는 건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 일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보는 것, 자신의 방식으로 보는 것, 그 일부가 세계 전체를 보는 것, 세계 전체를 보는 방식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이 세계를 잘 드러냈다고 해서 그 방편이 보편의 칙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방편이 나의 것이 될 수도 없다. 그의 세계가 나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방식을 나의 것으로 삼아 따르고 숭배하는 것은 나의 비굴함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의견이 일치해 어떤 것을 참된 것으로 간주할 때조차 그 참된 것의 전제적 지배에 반대해야 한다.

니체 《서광》

18.JPG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사르나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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