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15

by 이광수

뭉클한 사진이다. 저 모습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아직은 30년 전이나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인도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풍경이다. 저 사진이 뭉클한 것은 그 안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저 이를 돕고 싶어서 이런 저런 갈등을 뿌리 치고 무거운 가방을 들어 달라 한다. 그렇지만, 어찌 저 무거운 것을 들어달라고 하나? 아니, 그러면 내가 일을 안 시키면 저 이는 뭐 먹고 사나? 하는 작은 갈등이 도돌이표 되어 끝없이 쿵쾅거리던 그 때 그 시절의 마음 쓰임은 아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순간, 얼른 눈대중으로 30킬로 정도 되는 짐을 머리 위에 얹고 뛰며 계단을 올라가고 꿀리 한 사람이 눈앞을 스치듯 지나간다. 마치 황야의 무법자 속사포 쏘듯 본능적으로 샷을 한 방 쐈다. 저이의 허락도 없이...빛도 자연스럽게 부족하고, 저 이는 짐을 올리자마자 뛰고, 나는 기계의 운명에 맡긴 채 셔터를 누른다.


저 이미지 안에는 내가 보지 못하는 희한한 세계가 펼쳐지리라는 설레임과 함께 셔터를 누른다. 사람의 눈으로는 저 움직임을 보지 못한다. 엄밀히 말 하면, 속도에 의해 전혀 달리 규정되는 저런 변화하는 풍경을 사람 눈이 굳이 인식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눈은 시신경과 뇌라는 인식 장치에 의해 규정되고, 그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굳이 디지털 같이 1/100과 1/50 혹은 1.5로 정해지는 시간의 단위 안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감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상이 빨리 움직이든 늦게 움직이든 시신경이 놓치지 않는 것은 모두 포착한다. 사람이 사는 세계의 영역은 모두 그렇다. 굳이 분별하고, 쪼개고, 칸막이 치고 할 필요가 없는 세계다. 그것이 원래 사람이 사는 법이었다.


기계가 잡아낸 꼬리가 길어진 잔 동작의 흔적으로 인해 저 이가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 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사람이 아닌 기계에 의존해 사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피커 볼륨을 높여야 비로소 들리는 것, 숲 속에 들어가서 자작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봄바람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것, 봐도 알고 안 봐도 아는 그 진실을, 증거를 들이 밀어줘야 새삼스럽게 알아차리고, 심지어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는 것, 이 모든 일들이 인간의 감각이 무시당하고 그 자리에서 기계와 디지털이 똬리를 틀어 주인 행세를 하는 세계 속에 우리가 살기 때문이다. 저 노동하는 인간을 사람의 눈으로 보면 아름답지도 자극적이지도 못한 그저 그런 일상 가운데 하나로 보이는데도, 저 사람의 노동을 기계로 찍어내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빛, 궤적, 문양 등이 평범한 이미지를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자극적인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파문이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지를 향하는 것이라서 사람이 실체인 저이가 사는 세계에 저이와 우리에 대해서는 아무런 변화의 추동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미지는 이미지로 존재할 뿐, 세계 변화에 그 어떠한 힘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지에 익숙해 살기를 그토록 바란다.


속도가 삶이 살아가는 어떤 정도를 벗어날 때는 그것은 과하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 과함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부터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과함의 경계를 이야기에서 찾는다. 어떠한 행동이든지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나가면서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 나누고,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나에게 들려주고, 나를 격려하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 행동은 적당한 속도라고 판단한다. 행동하는 과정 중에서 이야기가 사라져 버리면, 무엇을 위해 그 행동하는 지를 알 수 없게 되고, 그 속에서 관계는 소실되고 애초의 의미는 망각돼버리고 오로지 행동을 위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면 기계로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대개는 그 속도를 제어하는 일에 실패하고 만다. 그것이 디지털 세계의 비극의 씨앗이다.


성실하게 살아온 당신, 이제 그만 성실해도 되지 않을까? 그저 남 하는 대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닐까? 평범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 되려면, 진부한 것을 좋아하고, 일상을 사랑하는 삶이 되어야 하는데.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사진가도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 굳이 롤랑 바르트의 표현을 빌려 말해 보자면, 강하게 찔리는 데서 오는 아픔, 격렬함, 자극이라는 개인의 풍크툼으로 가득 찬 사진의 세계가 아닌 누구나 다 알고 나누는 일상 같은 스투디움으로 가득 찬 사진의 세계를 더 추구하는 것이 그런 평범한 사진하기다. 그 안에 이야기가 있고, 그 안에 삶이 있고, 그 안에 나눔이 있는 그런 사진하는 삶 말이다.


생산성이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규율의 기술이나 금지라는 부정적 도식은 곧 그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규율의 패러다임은 ‘성과의 패러다임’ 내지 ‘할 수 있음’이라는 긍정의 도식으로 대체된다.

한병철, 《피로사회》

15.JPG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러크나우, 2009,


작가의 이전글사진으로 긷는 인문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