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19

by 이광수

사람들이 죽은 자를 들고 강가로 온다. 예의 여자들은 없고 남자들만 온다. 죽음이 한 인생의 통과의례 가운데 가장 무거운 것이라 그런 성스러운 자리는 여자가 참여할 수 없다. 아무도 울지 않는다. 그저 묵직한 분위기만 깔린다. 죽은 자는 강물 앞에 내려 놓인다. 다시 강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이 태워지기를 기다린다. 화장을 하는 모습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지만, 꽃단장을 하고 그 의례를 기다리는 모습은 무방하다. 카메라를 든 나는 조의를 표하고 눈으로 허락을 맡는다. 망자에 대한 예의로 샷을 날리지 않는다. 한 땀 한 땀 바느질 하듯 위치를 정하고 빛을 읽으며 몇 커트만 누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죽은 자는 자신이 찰나의 멸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니 그 죽음이라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 주체에게는 말이다. 힌두 세계에서 죽은 자는 나무로 짜인 관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맨 몸을 하얀 천으로 두르기만 할 뿐, 아무런 것도 입지 않는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차피 무로 돌아가 강물에 뿌려져 자연으로 순환하는 것인데, 관이라는 어떤 집에 임시로 거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 산 사람이 만든 의례일 뿐이다. 죽은 자는 알지 못하니 그것은 죽음에 대한 예식이 아니고 그가 죽고 없어 위기에 몰린 산 사람이 만든 삶에 대한 의례다.


장례에 참가한 사람들의 얼굴을 찍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예의를 차리고자 해서가 아니다. 이 사건은 비록 그가 찰나의 멸을 인식하지 못한다지만, 여전히 죽은 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얼굴이 없으면 그는 사진에서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이다. 죽은 자는 얼굴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나 사실은 있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저 감추어진 얼굴이라도 그가 중심에 놓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산 자의 발아래 놓이나, 결국 그 주인공은 삶의 원천이라 믿는 강으로 갈 것이다. 강은 어머니고, 그래서 그가 태초에 온 데로 돌아가는 길을 지금 준비하는 중이다.


난, 죽음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다. 죽음은 삶에 대한 극단적 이분의 상태에 놓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힌두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같이 죽음이 삶이고 삶이 죽음이라는 믿음을 갖지 않아서, 그런 이분법적 사고는 부인하면서 산다. 민족이나 종교에 대한 횡행하는 개념을 싫어하는 것도 이런 이분법의 세계관이 싫어서 그렇다.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저렇다, 아침형 인간은 이렇고 저녁형 인간은 저렇다, 다 쓸데없는 규정하는 짓들이다. 그 가운데 특히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늘어놓는 것은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다. 모두 다 궤변으로 친다.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겠느냐는 공자의 차원이 아니고, 죽음에 대해 말하는 자는 모두 속이는 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 있다. 사실 이 대지는 삶을 포기하고 떠나라는 설교를 들어 마땅한 자들로 가득하다. 대지는 쓸데없는 자들로 가득하며, 삶은 너무도 많고 많은 어중이떠중이들 때문에 썩어 있다. 그들을 영원한 삶이라는 미끼로 유혹하여 이 삶으로부터 떠나버리게 만든다면 좋으련만!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0.JPG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 바라나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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