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20

by 이광수

붓다의 이빨을 안치했다고 하는 스리랑카 콜롬보의 유명한 한 불교 사원을 찾았다. 하루에 몇 번 시간을 정해 놓고 그 안치물을 보여주는데 먼발치에서라도 보려고 아주 안달이 난다. 인산인해다. 줄을 서서 붓다 이빨과 최대한 가까이까지 가려고 기다리는데, 단 1초라도 더 그 앞에 서서 기도를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쩔 수 없이 뒤에서 밀고 오는 사람들에 밀려 그 자리를 떠나는데, 자꾸 뒤를 돌아보는 그 아쉬움을 뭘로 비교할 수 있을까. 그 앞에 가서는 돈을 바치려고 발버둥을 치고, 그 돈을 수거하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돈을 긁는다. 한 사람이 빗자루로 쓸어내리면 다른 이가 테이블 아래에서 그 돈을 그러모은다. 난, 구경꾼으로 그 절절한 불심을 비웃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만, 헛웃음을 참을 수 없다. 씁쓸함이 입가에 괸다.


붓다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도저히 따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내용이다. 붓다는 그 어려움을 사람들과 타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어렵게 가르쳤다. 더욱 많은 대중이 듣고 이해하고 따르는 것에 방점을 두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 진리란 대중적인 것이 아니고, 한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쉬울 필요는 없다. 누구든, 글이든 사진이든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듣기 어렵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내보이면, 그 뜻은 그것을 읽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읽고 해석하면 될 일이다. 작가에게 해석의 권한이 다 주어진 것이 아니고 독자에게도 그 권한이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러다 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수가 있다. 배가 산으로 올라가면, 배는 산으로 가는 것이기도 하지, 라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불교라는 것이 붓다가 말하는 바가 아니고 그 어려운 바를 후대가 해석하는 바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길이라면, 뭐 이해 못할 바도 없다. 그래서 붓다의 길과 후대의 제자들이 해석하는 길은 전혀 다르다. 남들은 변질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변화다. 다른 길에 대한 모색이다. 배가 산으로 가는 것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함께 가는 어떤 길을 좇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붓다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고, 제자들 또한 그리 하였다. 그런데 그 범주가 어디까지 일까?


기독교 세계는 이와 다르다. 그것은 올바른 것, 진리가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시각이다. 그가 무엇을 말했는지가 중요하지, 그가 말하는 것을 나는 이렇게 보았다, 라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들 판단한다. 진리란 어떻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어떠어떠한 것이어야 한다. 본질은 유일무이한 것이고, 그것은 변질 될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모두가 그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 존재의 성격이 홀로 독특함에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그러한 것은 이단으로 친다. 그들은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 아닌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모두가 동일한 것을 배우고 익히고 따라감으로써 진리는 동류의 학學으로 규정된다. 절하되는 것이다. 학 혹은 지식이 위험한 것은 동질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성을 애써 죽이고 보편성을 추구한다. 독특성이 튀어 나오더라도 결국 시간 속에서 대중화로 포용해버리면서, 결국 익숙한 것으로 전화되어 버린다. 이러한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난 곳이 근대 사회다. 그 안에서 익숙한 것에 대해 도전하면서 팽팽한 긴장을 야기하려 하는 자는 전복자다. 위험한 자다. 그것을 가장 잘 설파하고 앞장 서는 것은 종교다. 그리고 학자는 종교의 사제가 하는 것과 같은 일을 맡는다.


그 안에서의 생각은 균질화를 이루고, 동류의 균질화는 사회와 연계되면서 권력이라는 전혀 다른 질의 속성으로 변한다. 그 권력화 된 진리는 진화하고 성장하여 커진다. 그것이 종교다. 그 종교는 처음에는 진리를 찾아 구도하는 단순심에서부터 시작하지만, 이후로 조직과 돈을 갖추게 된다. 그리고 모든 이로 하여금 그 발아래 복종하도록 강요하고 하고, 그것을 착하고 참된 믿음이라 칭송한다. 이른바 구도의 길을 포기하고 종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들은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을 좇는 사람들이다. 그 이상은 현실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에 대한 강한 집착이다. 지금 생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을 다음 생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욕慾이다. 그 욕의 꿈을 추종하는 사람들, 노예의 삶이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행복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들이 불안하다.


콜롬보에서 만난 저 노파들. 그들이 사원 측에서 마련해놓은 한 칸막이 안에 앉아 있다. 다음 차례를 대기하는 중이다. 그들은 복을 받으러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겠지만, 내 눈에는 욕慾을 채우러 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그들이 어떤 틀 안에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그들이 집요하게 이상을 좇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롭지 못한 영혼의 수용소 말이다. 붓다의 제자들이 그 스승의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라고 하듯, 나는 저들의 저 삶을 이렇게 보았다.


우상이란 우리 자신이 만들고 우리 자신의 힘을 투영시켜서 우리 자신을 약화시키는 하나의 ‘사물’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19.JPG 스리랑카, 콜롬보,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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