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긷는 인문 21

by 이광수

가스가 누출된다는 경보가 울리자 사람들이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2,259명이 현장에서 즉사했다. 오랜 기간 동안 아픔은 지속되었고, 결국 현재까지 약 16,000명이 그 가스 때문에 죽었고, 그로 인한 부상 후유증에 시달린 사람들의 수가 50만이 넘는다. 인도 중부에 있는 보빨Bhopal에서 1984년 12월 2일부터 이틀 간 터진 인류 최대 규모의 사고 참사다. 참사 주범인 미국 회사 유니언 카바이드Union Carbide사는 공장을 폐쇄하고, 피해 보상을 대충 얼버무린 채 떠나버리고 없고, 인도 정부는 그 흔한 추모관 하나 지어놓지 않았다. 사람들은 무기력하다.


어느 화창하고 따뜻한 겨울, 한 개인이 운영한다는 아주 작은 박물관 겸 추모관을 찾았다. 변두리 한적한 동네 주택가 가운데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에 꾸렸다. 정부 측 보조도 없고, 그저 세계 각지에서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사람들이 십시일반 보내주는 작은 정성들로 꾸려 나간다. 힘 있는 권력이 잔인하다면, 힘없는 개인들은 끈질기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은 바위가 깨지고 안 깨지고의 문제가 아니다. 계란을 던져야 할 때는 던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작은 사람들이 그 기억을 위해 끈질기게 계란을 던진다. 그 추모관을 지키는 분 한 분이 계신다.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바는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공감하고 기억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여느 것과 다를 바 없는 그 계단은 어찌 그리 가파른지, 실내는 어찌 그리 어둡고 칙칙한지, 사진들로 도배가 된 그 칸막이들은 어찌 그리 답답한지. 분노도 아닌, 슬픔도 아닌, 무기력도 아닌, 도대체 뭔지 모를 이상한 것이 자꾸 기어올라, 오래 있지를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밖으로 나오는 것뿐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참으로 청량한 공기다. 세상은 환하고, 밝다. 집 외벽을 칠한 저 아름다운 색들을 보라. 색이란 스스로 색을 갖는 것이 아니라, 채색되는 것이다. 저 집 색이 저렇게 찬연한 것은 내가 슬프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슬플수록 세상은 밝게 빛나더라는 경험을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나의 슬픔이 저 집을 저렇게 색칠한 것이다. 슬픔은 기억 속에 있고, 현실은 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저 집은 저렇게 찬란하게 밝은 것이다. 슬픔은 자체로서 슬픈 것이 아니고 그 슬픈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슬프다. 우리는 그 기억을 다른 사물과 연결시켜 그 사물 또한 슬픔으로 연계시키곤 한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슬픔이 몰려오면 세상 모든 것이 다 슬퍼진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홀로 자발적으로 그 성격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대하는 '나'의 감정에 의해 정해진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과 연관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나’는 없다. 그 시간이 흘러가버린 것이라면 ‘나’ 또한 흘러가버린 것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실체가 아니고, 본질이 아니고, 흐르는 물과 같은, 시간이 남기고 간 흔적 같은 기억 뿐이다. 아무리 즐거웠다 하더라도 기억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의 현실은 아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슬픔 또한 마찬가지다. 주박에 걸린 듯, 빠져나올 수 없는 것 같겠지만, 그 안에 영원히 갇힐 수는 없다. 그 안에 현실은 없고, 오로지 있는 것이라고는 끝이 나고 없어져버린, 죽어버린 과거의 것밖에 없다.


현실은 결국 흘려보낼 수밖에 없다. 죽도록 그립고 사무치더라도, 그것은 그저 그리움이고 사무침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리움과 사무침으로는 결코 죽지 않는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죽는 것은 무엇인가 실체가 있는 것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실체다. 그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기억은 소환되더라도 금세 사라지기 마련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눈물은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밥숟갈은 위로 처 올리는 자연법 안에 있다. 그래서 내 눈에 회색이고 잿빛일 때 세계는 빛난다. 찬연한 빛이라는 게 결국 잿빛이 있어야 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고, 그것은 잔인하다. 그것이 고통의 세계다. 그 고통의 바다는 붓다가 말하듯 세상 모든 것이 생과 멸의 과정을 겪어서가 아니고,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온통 파라독스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파라독스를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밤 사각모를 쓴 대학생이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부모님 몰래 나가보니 그가 나를 안아 주더라. 조금만 참아라. 내가 졸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너를 데려갈 터이니. 안아주고 뽀뽀 해 주며. 여자아이들은 정신이 아득해지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답니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답니다. 밤마다 사각모 대학생이 찾아 와 안아준다니 소문은 동네를 칭칭 감고 가시내의 부모 허파를 뒤집어 놓았죠. 긴상네 딸이 밤마다 사내놈이랑...열세 살이었답니다. 동네 부끄럽다. 열세 살 어린 딸을 멀리 가난한 조센징 맏며느리로 팔아 버렸대요. 시집가서 새벽부터 밤까지 농사일을 하던 그 가시내는 동갑내기 시누이에게 또 그 이야기를 했답니다. 시누이는 오라비와 어미에게 고자질을 했고 가시내는 죽어라 두들겨 맞았답니다. 더러운 것. 심약한 가시내의 남편이 등을 돌렸고 가시내는 보따리 하나로 쫓겨났답니다.”

김미옥, 미발간 이야기 〈열세 살의 어머니〉에서

21.JPG 인도, 마디야 쁘라데시, 보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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