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X. 이야기로 만민을 교화하라. 5. 이띠하사 Itihasa 역사
고대 인도에는 신화가 참으로 많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석해 드린 것을, 잘 보신 분들은 그 신화의 이야기가 완전히 허무맹랑한 게 아니고 나름 그 안에 분명한 메시지가 들어 있음을 아셨을 겁니다. 완전 팩트는 아니지만,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은 이야기도 아니라는 거지요. 있었던 사실에 살을 여러 가지로 보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게 [마하바라따]와 [라마야나]라는 서사시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문학의 장르를 ‘이띠하사’(itihasa)라고 불렀습니다.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이렇게(iti) 실제로(ha) 있었다(asa)’가 됩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규명된 것만 사실로 정리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거지요.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경이’였어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그것이 신의 뜻이든, 업보의 결과든, 우연이든, 뭐든 경이를 사실의 중심에 놓고 본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신화를 역사로 본 것입니다. 그들은 그 신화가 허구인 걸 알면서도 사실이라고 규정한 게 아니고, 그게 사실 그 자체라고 믿었다는 겁니다.
이띠하사는 기본적으로 구전입니다. 성스러운 이야기를 성스러운 언어로 기억에 새기고 기억으로 전하는 게 바람직하지, 무미건조하게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적어서 정리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 거지요. 구전의 전통 안에서 특정 개인이 경험한 주관적 세계나 신비 체험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방식이 발전하는 겁니다. 이러한 전통은 베다 시대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이야기꾼에 의해 위인들의 행적, 족보 등이 구전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이야기꾼들은 제사와 같은 부족 공동체의 큰 행사가 있을 때 그 가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데, 이야기를 들려줄 때 분명히 일어난 어떤 사건을 목격하거나 경험한 것만 역사로 인식하여 전해 준 것이 아니고 있었을 법한 이야기를 신들의 이야기와 연계시켜 이야기로 들려주었지요. 이 전통은 후대로 이어지면서 그 이야기는 이야기꾼과 그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집단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들의 최고 경전, 근본 중의 근본인 베다가 역사를 이야기로 보고, 구전으로, 듣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만들어낸 것을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보았으니, 그 권위를 따라 과거를 그렇게 뼈대에 살을 보태 지어내는 것으로, 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현대에 사는 우리가 객관과 과학을 권위의 기본으로 삼듯, 그들은 경이로운 체험을 그 권위로 삼는다는 것이지요.
권위라는 게 뭔지, 한 번 생각해 보지요. 그 권위를 스스로 만들고 가꿔 가는 사람은, 바른 사람이고 된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런 사람은 사회에서 어떤 권력을 가지지 못합니다. 실제 권위란, 누군가가 만들어 준 구조 안에서 작동합니다. 그 구조에 성(聖)의 옷이 입혀지면, 그 권위가 권력과 쉽게 연결되고요. 권위가 민주적이면 권력을 제한적으로 행사하지만, 권위가 베일에 쌓이면 거대한 권력이 되는 겁니다. 다중은 대체로 베일에 쌓인 신비를 우러러보지요. 아우라라고 하는 게 여기서 작동합니다. 어떤 사물이 아우라가 있다는 건 민주적이지 않고 그것과 나 사이에 범접할 수 없는 경계가 있다는 건데, 사람들은 그걸 좋아해요. 대체로 사람들은 권력이 된 권위에 복종하고 싶기까지 합니다. 노예근성이라고 해야 할지,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인지는, 잘 모르겠지요만.
힌두교 최고의 권위는 베다입니다. 베다의 권위는 한 획 한 줄도 의심받지 않는 절대적 권위입니다. 어떻게 그런 권위를 만들었을까요? 신이 계시라는 거지요. 사람들은 누군가 하늘에서 절대 존재가 성령으로 계시하고 그걸 보고 듣고 받아 말씀으로 삼았다 하면, 그 절대적 권위를 인정합니다. 힌두교에서는 이 계시 외에 또 하나의 권위 만들기의 방식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으로 내려오는 전승 즉 스므리띠라고 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지요. 그 전승은 실제로는 누군가 사람이 만들었겠지만, 신의 뜻을 받고 기억한 리쉬라는 신선이 지은 것이라 해서 절대적 권위와 권력을 창출했지요. 그 전승은 시대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보태지고, 삭제되고, 바래고, 번지고, 옅어지고, 흐려졌지요. 원형은 저 밑바닥 어딘가에 있는 둥 없는 둥, 실체는 시대에 따라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변했더라도, 그 적법성과 유효성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리쉬에 의해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신의 이야기로 되는 것이고, 그게 과거를 기술하는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장면 하나를 떠올려 볼까요? 배 침몰할 때 끝까지 갑판에 남아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며 장렬한 죽음의 길을 택한 그 장면 말입니다. 그런 사실이 실제로 있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사를 기록할 때 있는 대로 기록하는 것보다는 있을 법한 장면을 만들어 아름답게 각색하고 창작해서 후세에 전하는 게 더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지요. 현실은 아비규환이겠지만,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고,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 사람이 사회의 구루 즉 스승이 된다면 역사를 있는 사실로만 기술하지 않고, 각색하고 살 보태기를 해서라도 그런 사회를 만들어내고 싶겠지요. 그런 스승들이 만들어내는 역사가 이띠하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