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X. 이야기로 만민을 교화하라. 5. 수뜨라 Sutra 經

여러 전승 가운데 인도 고대 사회에 실제 적용되는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이었습니다. 그 법은 힌두 사회의 근간인 다르마를 의미하지요. 그래서 그 다르마란 도덕이고 의무이지만 지키고 따라야 하는 법인 거지요. 전형적인 불문법 전통입니다. 계시가 중심이 된 베다 사회는 아직 분화하지 않아 사회의 여러 측면이 고려되고 적용되는 법이 필요치 않았지만, 그 시대가 끝나고, 카스트가 분화하고, 남녀, 국가, 가족, 재산, 형벌 등의 문제가 여러 면으로 불거지면서 그에 관한 다르마를 편찬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다르마 수뜨라(dharma sutra)입니다. 앞서 말했듯, 그 전승은 특정 리쉬가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간주하니 다르마 수뜨라 앞에 붙는 아빠스땀바(Apastamba), 가우따마(Gautama), 바우다야나(Baudhayana)와 같은 이름은 특정 리쉬의 이름이고, 그 수뜨라는 그 리쉬를 중심으로 하는 학파를 말하는 겁니다. 실제 신의 경지에 이른 어떤 리쉬가 없었을지라도 그 이름을 중심으로 법의 해석을 그렇게 한다는 사람들이 모이는 학파라는 거지요. 실제 그 해석을 주도한 특정 개인의 인간 존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가상의 리쉬가 차지하는 거지요.


수뜨라의 원래 뜻은 ‘실’(絲)인데, 짧은 단어로 지식의 핵심을 응축시켜 실로 꿰어 놓은 듯 편찬했다는 뜻이라 그렇게 썼습니다. 일종의 아포리즘 혹은 아포리즘의 모음이니, 운문으로 된 것입니다. 왜 실제 사회에 적용하는 법을 아포리즘과 같이 애매모호하고 해석이 충돌할 수 있는 운문으로 했을까요? 그것은 힌두교에서 지식이란 베다에서 나와, 성스러운 언어로 전승 즉 구전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기억 전승이 우선 목적이니, 당연히 짧고 압축적인 문장이 좋겠지요. 당연히 운율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불교 경전을 암송하는 걸 듣거나 해보신 분은 그 운율이 암송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아실 겁니다. 그러니 문제는 기억과 전승이라는 겁니다. 결국, 수뜨라는 ‘짧은’ 문장이 아니라, ‘압축된’ 문장이라고 봐야겠지요. 이러한 암송 문화는 힌두 사회에서 지식이란, 스승(구루)과 제자 간의 대화로 기억되고 전승해야 해서 스승이 해석하고, 설명하고 그것을 제자들이 함께 암송하여 형성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스승의 해석은 암호처럼 압축적으로 제시되었다는 겁니다. 그뿐만이겠습니까? 짧고 운율이 있는 언어일수록 성스러움은 더해지고 그 위에서 권위가 세워진다는 종교 특유의 논리가 작동해서겠지요.

그런데, 그 구전의 전통이 진행되는 사이에 1천 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고, 그 속에서 사회는 매우 심하게 분화가 되다 보니, 수뜨라의 해석을 둘러싸고 자꾸 실제적인 충돌이 생기는 사회 현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샤스뜨라(Shastra)라는 길고 논리적인 산문으로 된 문장의 법전이 생기게 됩니다. 이제 단순한 명제가 아니라, 법 개념의 설명, 해석, 그 적용 논리의 전개, 예시, 논증, 반론 등을 아주 깊게 포함합니다. 당연히 산문으로 하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원래는 수뜨라 문헌의 주석서로 출발했는데 나중에 독자적인 장르가 된 거지요. 힌두 사회가 그리스와 달리, 담론 전개에서 개인의 역할은 드러나지 않고, 학파 간의 논쟁이 심화하면서 논리와 추론이 크게 발전한 건 바로 이런 지점에서부터입니다. 수뜨라가 명제를 던지는 것이라면, 샤스뜨라는 그 명제를 논증하고 반론하는 담론을 발전시키는 거지요. 우리가 인도의 대표적인 법전이라고 치는 《마누 법전》은 ‘마누’ 학파가 편찬한 법의 샤스뜨라라는 말입니다. 대체로 수뜨라는 ‘경’(經) 샤스뜨라는 ‘논’(論)으로 번역하지요.


이러한 수뜨라-샤스뜨라 전통은 힌두교에서 발전한 것이지만, 불교에서도 별로 다를 바 없이 전개됩니다. 힌두교에서는 절대 지존의 베다가 있었지만, 불교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이 있었고, 그래서 그 붓다의 말씀은 수뜨라로 편찬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학파의 다른 의견이 새로운 해석으로 나타나는 거지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기원후 2~3세기에 활동한 나가르주나(龍樹)라는 이름의 승려가 펴낸, 《중론》입니다. 이 새로운 해석은 공(空)을 붓다의 가르침과 달리 새롭게 해석하여 대승불교의 기틀을 잡았지요.

수뜨라, 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는 인도 사회는 절대적인 지식 하나에 모든 걸 다 거는 근본주의적 사회는 아니겠구나, 라는 생각을 쉽게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문화의 분위기는 결국, 객관과 사실을 절대성의 요체로 삼지 않고, 주관과 해석을 상대성의 요체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 중심의 사회가 되면 어떤 사회적 현상이 생길까요? 아무래도 그 종교적 해석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사회의 권리를 독차지할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수뜨라든 샤스뜨라든 그 법과 신학을 독점하는 권한은 브라만 카스트에만 있으니, 근대 이전 사회에서는 브라만의 권력이 무소불위였겠지요. 법을 만드는 자보다 더 큰 권력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2025년 내란 청산의 과정에 있는 한국 정치에서도 이 진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법을 만드는 자, 그들에게 권력이 있습니다. 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느냐 못하느냐는 그들의 능력 문제겠지만, 분명히 칼자루를 쥐는 자는 법을 만드는 국회이지 법을 집행하는 법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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