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눈으로 보는 것과 카메라라는 기계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보는 것과는 매우 큰 차이가 나타난다. 유리창이나 거울과 같은 물건에 뭔가 반영에 의한 상이 만들어지는 경우 특히 그러하다. 우리 눈으로 볼 때는 특별히 혼란스러울 게 없지만 카메라로 봐 이미지를 만들어낼 때는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눈은 기계가 아니라서 스스로 입체적 맥락을 감안하여 파악하기 때문에 그 안에 맺힌 상이 무엇인지 혼란스럽지 않지만 카메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기계에 의해 단면적으로 나타난 것이라 그렇다. 그 이미지는 맥락을 감안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 눈으로 그걸 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비단 우리가 보는 눈앞의 장면만 그러한가? 더 거대한 실재 세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장자가 말 한 바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세계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말이다.
고대 인도의 철인들은 세계를 환幻으로 보았다. 그 환은 유한하고 일시적인 것이다.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같이. 끝에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빙빙 돌릴 때 불은 끊어지지 않은 채 큰 원을 만드는 것 같이. 그것이 환이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환이라면 이 세계는 절대 존재 혹은 본질이 없다는 말인가? 잠시 빛을 보지 못한다고 해서 태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나무를 보는 것은 씨앗을 보는 것인가, 아닌가? 고대 인도에서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논증하면서 궁구해 온 환과 실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은 카메라로 만든 이미지를 보고 사유해 본 덕분이다.
우리 같은 범인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비단 세계의 본질과 환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와 유사한 차원에서 우리 자체의 본질인지 환인지 모르는 또 하나의 존재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본다. 야누스의 두 얼굴은 우리 눈으로 보는 매일의 얼굴과 특정 조건이 성숙되면 드러나는 그러나 익히 알고 있는 또 다른 얼굴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나 이외의 누군가의 감추어진 그 얼굴을 간파하지 못하고,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드러날 때 소스라치게 놀란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 텐데, 우리는 그것이 애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해왔기 때문이다. 그것이 드러나는 징후나 기미는 사실 우리 스스로 이미 알고 있다. 내 스스로 나를 바라 볼 때 그 존재가 거울이나 유리창에 비친 그런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본질을 가진 또 하나의 존재임은 다 알고 있을 테지만 우리는 애써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서 다른 이로부터 그 얼굴이 드러나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자신과의 결탁 가능성을 결사적으로 지워버리려는 발버둥이다.
당신은 침몰하는 세월호에 접근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접근하였겠는가? 그 상황에서 승객들을 구조하라고 접근하라는 명령이 제대로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당신 스스로 접근하였겠는가? 부패한 관료들을 비판하는 당신은 당신에게 부패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아니한가? 당신 안에 들어 있는 그러한 매우 익숙한 일상에 왜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는가?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당신이 사는 세계는 저 유리창에 비친 온갖 것으로 중첩되고 반영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으면서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비실재의 환인가 아니면 당신 눈으로 보는 맥락과 상황으로 분명하고 또렷하게 파악할 수 있는 욕망의 실체인가? 당신이 그렇게 악다구니로 잡으려 애쓰는 그것이 당신을 변화시키는 본질인가 아닌가? 세계는 당신에게 무엇인가? 세계는 정신과 물질, 본질과 현상의 둘로 나누어져 있는가? 세계는 원인이 있고 그에 따라 결과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결과는 그 원인으로부터 발생하지 않고 그 원인 또한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니 결국 아무런 본질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인가?
나에게 세계는 거울이나 창에 비친 반영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면서 의미를 두는 모든 것들을 한 때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치부하여버리는 것은 종교일 뿐이다. 내가 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그러하지 않다. 인간은 세계 한가운데 있는 독자적으로 완전한 존재다. 그리고 그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분명한 실체다. 보이는 세계도 그렇고, 보이지 않는 세계도 그렇다. 밖으로 드러난 것이든 애써 안에서 감추려 하는 것이든, 그 둘은 다르지 않다.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궁극적으로 하나다. 욕망도 인간이 살아가는 자연의 일부다. 애써 살아가는 욕망을 집착으로 치부하는 것은 인간을 신으로 노예로 삼으려는 짓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환이란 초월성 혹은 신에 굴복한 자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내면에 있는 욕망을 애써 감추려는 것도 욕망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 욕망을 부인하는 것일수록 굴복하는 것이다.
욕망을 어떤 정서에 따라 어떤 것을 하도록 만드는 것으로 여기는 한, 욕망은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
스피노자 《에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