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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7.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27.

26. 경쟁

코로나가 창궐한 이때 소위 ‘집콕’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삶의 모습이 너무 많이 달라진다. 그러던 중 우연히 뉴질랜드 풍경을 보게 되었다. 실시간 동영상인데, 아무도 마스크를 끼지 않은 채 야외에 모여 고기도 굽고, 와인도 한 잔 하면서 풀밭에 누워서 쉬는 이도 있고, 개와 아이들과 뛰어 다니면서 쉼을 만끽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독교 교리에 의해 이미지로 만들어진 ‘푸른 초장’에 쉴 만한 곳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 저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단 몇 도 지나지 않아, 저런 심심한 천국에서는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재미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곳은 활기가 없다. 그 활기는 이 나라가 최고다. 그곳은 심심해서 죽을 천국, 이곳은 재미있어서 죽을 지옥, 이런 생각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난, 그것을 니체가 말하는 아곤(agon) 즉 경쟁에서 찾는다.      


니체는 모든 재능이란 싸우면서 활짝 피어나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뜻에 따르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의하면 자연은 모든 생명체들을 힘을 기준으로 수직적으로 줄을 세운다. 즉 강한 자가 지배하고 약한 자는 지배를 당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인간은 사회에서 인위적인 힘을 가해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어버려 근본적인 힘을 다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모두 다 같아지려는 욕망을 앞세우게 되고 그 같아짐에서 허무함이 싹트는 것이다. 제도적으로 모두 다 똑같아지는데 굳이 누가 더 강해지려고 하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니 자기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내는 극복과 고양의 노력을 앗아가는 사회가 되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아곤 즉 경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애초 이 아곤의 개념을 그리스 세계에서 찾았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뜻을 따르면서도 야만으로 빠지지 않았다고 보는데, 그 기초는 바로 이 아곤에 의한 강자와 약자의 구별 때문에 있다고 봤다. 그것이 인간 정신을 최고로 고양시킨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세계를 어떤 단일하고 불변하며 참된 본질이 있다는 플라톤의 이분법적 초월 세계를 철저히 부정한다. 그가 보기에 세계는 끝도 한도 없이 변한다. 영원한 참 된 것도 없고, 그 영원히 참 된 것에 의한 어떤 전제도 있을 수 없다. 이는 세계가 ‘아곤’ 위에서 성립됨을 전제 조건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니체는 부당하고, 거짓인 것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도 반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참 된 것에 의한 지배에 대해서도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기독교 같은 절대주의 종교는 두 말 할 필요도 없고, 힌두교와 같은 상대주의 종교에서도 널리 나타나는 신화에 재현된 ‘진리의 화신에 의한 영원한 통치’에 대해서도 분명한 반대인 것이다. 그것은 제 아무리 훌륭한 가치일지라도 시간이 가면 결국 부패하거나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게 되어 있다는 역사의식의 발로다. 그러니 그 변하는 것에 대한 끝없는 싸움을 하지 않으면 처음 세웠던 참 진리는 다시 악의 세계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진리라는 단독자가 지배하는 전제적 통치 체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진리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의 성격으로 규정될 수 없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어야 하고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것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끝없는 경쟁을 해야 하고, 그것과 적대적인 관계에 서는 반(反)진리가 있어야 한다. 그 반(反)진리에 의한 계속 되는 도전, 유혹, 질투, 난관, 고통 등이 있어야 되고 그와 싸워서 이겨내야 진리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게 됨을 인류가 더욱 건강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의미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그렇게 된 운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반(反)진리의 동음이의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교를 통해서 익히 알게 되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폭 넓고 깊은 힌두교의 세계관인 윤회를 기반으로 하는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advaita 아드와이따) 세계관과 매우 비슷하다. 그 세계에서는 창조는 곧 파괴이고, 파괴란 다름 아닌 유지이며 유지란 다름 아닌 창조이다. 삶의 이면은 죽음이고 죽음은 곧 삶의 다른 재현인 것이다. 모두 윤회라고 하는 영원의 시간 차원에서 성립된 개념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시간관은 이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그 어떠한 것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속성에 맞지 않는 여러 적대적인 다양한 ‘진리들’이 필요한 것이니, 결국 세상에 진리 아닌 것이 없고 진리인 것이 없게 된다.      


이를 우리 사는 세상으로 돌려 생각해 보자.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적이 되고, 오늘의 적이 내일은 다시 동지가 될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의 이치다. 그러니 배신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애달파 할 필요도 없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도 하지만, 그와 반대의 방향으로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삶은 이 이치에서 돌아간다. 그렇다면, 좋은 정치란 강력한 힘을 가진 단독자 1인 혹은 단일 세력이 ‘올바름’을 무기로 사회를 안정하게 유지하는 체계보다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여러 세력들로부터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시달림을 받으면서 스스로 힘을 길러내고 그 힘들이 충돌하면서 경쟁하는 장 즉 아곤을 유지하는 상태가 더욱 바람직하다고 본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 안에 경쟁이 펼쳐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모든 일상에서 치고 박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등의 자연의 질서가 운항되어야 건강한 곳이 된다. 모든 권력을 다 쥐고 있는 목사, 가부장, 회사 대표, 대학 이사장, 신문사 사주, 검찰총장 등은 반드시 썩는다. 썩지 않으려면 그 절대 권력에 도전하는 경쟁이 커냐 한다. 그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힘이 나와야 한다. 그러한 자연의 질서는 약육강식의 야만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쉬지 않는 경쟁이 있고 그 속에서 휴머니즘이 고양되는 세계, 그곳이 니체가 생각하는 인간 존엄이 충만한 세계다.      


참된 것의 전제적 지배에 대한 반대 – 우리의 모든 의견들을 참된 것으로 간주할 정도에 이르게 될 경우에조차도 우리는 이러한 의견들만 존재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진리가 단독으로 지배하고 전권을 갖는 것이 왜 바람직한지 알지 못한다. 내게는 이미 진리가 큰 힘을 갖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진리는 싸울 수 있어야 하고 적대 세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진리에서 벗어나 비(非)진리에서 원기를 회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진리는 지루하고 무력하며 무미건조한 것이 되며 우리 역시 바로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서광》 507

보이지 않는 곳

싸움이 벌어진다.

그 외는 모두 죽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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