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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09.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30.

29. 고통

니체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누군가의 책을 통해 이런 글을 읽었다. 니체가 말년에 친구인 오버베크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절망적이네. 고통이 내 삶과 의지를 집어삼키고 있어. ... 다섯 번이나 죽음의 의사를 불렀다네 ... 하지만 고통의 깊이가 깊을수록 생각도 깊어져, 그전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생각들이 떠오른다네,"라고. 니체가 소위 토리노의 말 사건을 겪고 난 뒤 우울증이 심해질 때의 일이다. 고통을 일부러 맞이하면서까지 삶의 진면모를 잡기 위해 싸운 니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철학을 실천할 수 있는 의지를 만들어가려 한 것이다. 그 안에 우리 같은 범인이나 할 수 있을 만큼 고통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은 그러나 그럴 수 없을 때는 결국 극복하고 승화해 내려는 자연스러우면서 아주 강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누구든 그 고통이라는 것을 죽기 전까지 완벽하게 피하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서 닥치는 고통의 필연성에서 우리는 고통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 고통은 행복이나 즐거움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것이다. 일반적인 것으로 규정 지을 수 없다. 주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고, 해석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서 고통은 삶과 밀착되어 있다. 고통은 홀로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삶 속에서 함께 다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삶 속에서 고통은 불가피한데, 삶은 더 나아져야 하고, 그러려면 결국 고통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다 보니 고통과 삶은 비례 관계에 놓인다. 고통이 클수록 그것을 극복하여 성취한 삶도 위대해지는 것이다. 결국 니체는 고통이 정신을 고양시키기 때문에 정신의 성숙을 돕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고까지 했다. 따라서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통은 장려되기까지 하고, ‘힘에의 의지’가 받쳐주는 사람은 바로 그 고통으로 인해 더 높은 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까지 했다. 니체는 고통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얼마든지 긍정하여 정신을 고양시키는 강한 인간이야말로 상대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고, 그러한 관용이 상대의 죄를 용서하는 원천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의 긍정성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이 종교라는 틀에서 만들어 전달해 준 긍휼이아 자비로 상대를 용서한다는 것은 주체적이지 못하고 결국 위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니체는 고통을 죄로 간주하는 기독교에 대해 특히 비판을 날을 세웠다. 그는 기독교에서 신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이유가 우리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신의 섭리론을 크게 거부했다. 기독교는 그 죄 때문에 주는 고통이라는 개념은 인간을 교회 안에서 순한 양으로 붙들어 매기 위해 고안한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니체는 고통은 원죄로 인한 것이 아니고 개긴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 자신의 삶이 정 고통스러우면 신에게 기도해봤자 필요 없고, 그것은 단지 아편을 맞고 환각 상태로 치유인 것처럼 속은 것일 뿐이니,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고 책임을 지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어리석은 삶을 자기 양심으로 고문하고 자책하는 인간을 어리석다고 비난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비록 어리석은 바보일지언정 죄인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기독교에 빠져 사는 사람보다는 더 나은 것으로 평가했다. 니체에게 고통이란 삶을 더 건강하게 살아나가게 만드는 계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고통은 있는 그대로 긍정하면서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었다. 고통이 좋아서 받아 들이라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이겨내야 다음의 삶이 있고, 그 삶을 사랑해야 인간으로서 제대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니체가 가장 중요한 삶의 정신이라고 여기는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 아모르 파티)다.   

   

이 책을 쓰는 도중 어느 날, 동지 한 사람이 충격적인 사고로 한 쪽 눈을 실명했다. 20년 넘게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에서 산재 예방 교육을 하고 다닌 전문가가 정년 1년을 남기고 자신이 산재를 당한 것이다. 무슨 말을 전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에, 나는 동지에게 이렇게 썼다. “사고 소식을 듣고 한 동안 망연자실하고, 정신이 어릿어릿해지는 순간, 니체를 읽었습니다. 니체가 고통은 정신을 고양시키기 때문에 정신의 성숙을 돕는 하나의 방법이 되는 것이라 했거든요.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려는 '힘에의 의지'에 의해 고통은 장려되기까지 한다는, 그 경지까지는 이해되지는 않지만, 정국장에게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노동인이자 예술인인 당신이 고통으로 인해 니체가 말하는 더 높은 정신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고통을 이겨내서 삶과 예술을 승화하기를 확신합니다.” 이 얄팍한 위로의 말에 동지가 전화를 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겨낼 겁니다. 제가 그 동안 좌절하지 말라고, 단지 불편할 뿐이라고, 했던 그 숱한 말들에 힘을 실을 있는 기회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당당하게 극복하고 높은 삶을 이겨내는 것이 노동 운동가 아니겠습니까?”      


고통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불행이 죄의 결과일 수는 더더욱 없고. 고통과 불행과 죄의 사이에서 어떠한 상응 관계가 있는지는 사람의 관점마다, 해석에 따라 달라지니, 뭐라고 딱히 규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종교에서는 있다고 하는 것이고, 종교 바깥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할 뿐이다. 수 십 년을 해 오는 일에 그날따라 이상한 일이 발생한 건 귀신에 씐 것일 수도 있고, 단지 내 실수 일 수도 있다. 공통적인 건 우리는 그 원인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일은 벌어졌고, 이제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인간다운 삶을 사는가이다. “조금 더 신중했어야 하고, 조금 덜 건방지게 했어야 했다.”의 방식이 “이 일의 배후에는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죄가 원인으로 숨겨져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 큰 불행을 겪을 것이다.”보다 더 인간적이고, 더 건설적이다. 니체는 이러한 기독교적 이치 즉, 삶에 죽음의 이미지 즉 죄의식, 무력감, 절망, 증오, 심판, 피로, 원한, 가책 등을 도입하는 것은 생리적으로 삶과는 맞지 않다고 했다. 삶이란 본질적으로 자기 극복의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와는 다르지만, 크게 볼 때는 결국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 고통과 불행에 대한 도덕의 해석이다. 니체는 도덕은 현실에 개입하면서 현실을 경멸하게 하는 해석이기 때문에 나쁜 해석이라 했다. 그것은 선과 악, 원한과 복수, 죄와 벌 등으로 이루어진 병적 세계관이다.     

 

"사실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그러나 고통 속으로 비밀스러운 구원 장치 전체를 집어넣어 해석한 그리스도교에게도, 모든 고통을 방관자의 입장이나 고통스럽게 만드는 자의 입장에서 해석할 줄 알았던 고대의 소박한 인간에게도 그러한 무의미한 고통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도덕의 계보》 7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면

파악하고, 이해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즐기고 받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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