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광수 Jan 10.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33.

32. 행복

평화에 소극적인 것이 있고 적극적인 것이 있다면 행복에는 짧은 것과 긴 것이 있을 것 같다. 긴 기간의 행복이라 하면 오랜 부부생활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어떤 규정하기 어려운 오묘한 상태, 종교적 깨달음, 깊은 학문의 경지 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싶고, 짧은 기간의 즐거움이라 하면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갈등과 위기를 아직 겪지 않은 상태에서 거머쥔 쾌감, 짜릿함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둘의 공통점을 굳이 들어보자면, 여러 종류의 갈등에서 이겨 얻은 마음의 평정 상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행복 혹은 즐거움의 토대는 어려움 혹은 고통이 된다. 그것이 사랑의 갈등이든, 육체적 싸움이든, 스포츠 경기든, 기업 간의 경쟁이든, 입시든 간에 누구든 그것을 이겨내고 난 후에라야 그 행복 혹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그러니 고통이 없이 행복은 있을 수 없고, 고통은 죽음이 삶의 원천이듯, 행복의 원천이 된다. 니체가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니체는 그 특유의 일원론 안에서 행복이란 자연성과 감각성, 그리고 이성 속에서 오랫동안 투쟁한 끝에 자유로워지고 그 무엇에도 매어 있지 않으며 때때로 완전히 풀어져 생기가 넘치고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것까지도 임의로 다스릴 수 있는 어떤 정신에 대한 하나의 기호라고 했다. 니체의 언명을 통해서는 물론이고, 우리 경험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듯, 즐거움이란 학문이나 기술처럼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나 비즈니스처럼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도 아니고 일정 부분 조건을 채워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하나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뭔가를 극복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인간의 본능을 제어함으로써 원초적 즐거움을 극복해야 제대로 된 기쁨, 환희, 법열(法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소위 금욕이라 하는 것인데, 전형적인 이열치열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태는 세상 속에 사는 우리 같은 범인으로선 도달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붓다와 같이 세상 삶 모두 다 버리고 세상 밖으로 나아가 평생 금욕과 정진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을 한다면 모를까, 우리 같이 사람 사는 이 세상과 함께 가는 사람들은 시도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 난, 그 궁극의 기쁨, 환희, 법열이 삶을 포기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면 굳이 그런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지는 않다. 니체의 주장을 동의하는 여부를 떠나 그런 경지라는 게 현실 밖에 있다면 나로선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서다.      


그렇다면 이번엔 금욕과 반대의 방향에서 생각해보자. 사회 내에서 여러 사람들이 성취한 것들을 좇아 따라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궁극적으로 누구나 잘 알 듯이 행복이란 자기 스스로가 쟁취하는 것이다. 누구에 의해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 어떤 사람이 경험해서 도달했다 해서 그것이 교본이 될 수는 없다. 누구든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그에 대한 지침을 내리고, 그에 따라 함께 그 길을 가려는 동지들을 규합하는 짓을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길이다. 그 길로 가기 위한 공통의 조건을 마련해보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이미 하나의 목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여럿이 함께 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될 수 없다. 뜻을 같이 한 후 규율을 만들고, 지침을 만들고, 권고라는 이름으로 제약이 만들어지면 그건 상대에 대한 관여가 되거나 그것을 넘어 강제가 된다. 개인에게서 어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오롯이 그 자신의 고유한 법칙들에서 솟아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 외부에서 – 그것이 가문의 전통이든, 공동체의 규정이든, 부모의 사랑이든, 종교나 도덕이나 이념이든 – 만들어진 그 어떤 가치가 끼어 들 여지는 없어야 한다.      


이러한 행복과 관련하여 행복을 소비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주로 타인을 모델로 삼아 그를 따라 가는 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고방식이다. 몇 년 전에 안철수라는 한 성공한 기업인이면서 비교적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이 그의 삶의 이력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정치에서 느닷없는 회오리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다. 저 사람의 길을 좇아가면 우리 아이도 저 사람 같이 되겠지, 저 얼마나 행복한 길인가? 공부 잘하고, 돈 많고, 의사에 대학교수에 컴퓨터 과학자에 기업 CEO에, 뭐 하나 갖추지 못한 게 없는 그를 지지하는 것으로 행복을 향한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그를 한껏 치켜 올리는 현상이 그야말로 회오리바람처럼 일었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저 사람이 가는 길과 내 혹은 내 자식이나 가족이 가는 길은 전적으로 다르다. 저 사람의 길은 저 사람의 길일 뿐, 내 아이의 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너무나 평범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를 지지하고 그를 소비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행복을 추구하는 길에 어떻게 보편의 길이 있겠는가?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자살 공화국인 이유 중 하나가 그런 보편적 행복의 소비에 있다. 그 보편 수준은 갈수록 상향 조정 되고, 그에 못 미치는 자신은 정신적으로 나락에 빠지고, 자기 자신의 존재감은 없어지고 그러면서 자살하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 니체대로 풀어보자면 삶을 헤쳐 나가면서 살기 위한 힘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힘은 자연스러운 본능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그 자연스러움은 개체의 독립성에 달려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 힘을 제어하는데 행복을 걸 뿐이다. 이유가 어떻든지 간에, 일에 몰두하는 사람,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 진보를 위해 나와 가족을 모두 희생한 사람, 돈을 벌어야 했고, 직장에서 성공을 해야 하는 사람,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사람, 자신을 돌아봄은 없고 일과 성과로만 만족하는 사람, 대중의 평판만 있는 사람, 말 하고 싶은 것을 억제하고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 감당할 수 없는 감정조차도 내뱉을 수 없이 살아온 사람 ... 그런 삶 안에서 힘이란 있을 수 없다. 다만, 있다면 파괴의 에너지다. 파괴의 에너지는 스스로를 제어하는데 쓰이고 그론 인해 자존감은 사라진다. 자존감이 사라진 자리에서 행복이 피어날 수는 없다. 그것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는 없으니, 그것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우선 그대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는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心像), 그대들의 의지, 그대들의 사랑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행복에 도달하게 되리라!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이러한 희망도 없으면서 어떻게 삶을 참고 견디려 하는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 속에서, 비이성적인 것 속에서 그대들이 태어나야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행복의 섬에서


행복하지 않은 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행복하게 하지 않아서다.

작가의 이전글 니체의 눈으로 보라. 3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