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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광수 Jan 11. 2021

니체의 눈으로 보라. 35

나가며 = 연재 끝. 그 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나가며

:어떻게 살 것인가?     

영화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영화 이야기로 글을 마치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어, 많이들 본 영화 하나 꺼내 이야기 해보자. 한국에서는 《반지의 제왕》이라고 알려진 세 편이 하나의 시리즈로 된 그 영화다.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간과 역사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난 뒤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뒤 책 집필을 완료하고 출판을 했다는데, 그런 흔적이 많이 보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 끝 부분에서 내 생각이 확고하게 굳었다. 니체 철학이 짙게 깔려 있다는 생각이다.      


주인공 프로도 배긴스(Frodo Baggins)는 난장이 호빗족에 속하는 절반만 사람인 존재다. 특출 난 혈통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뛰어난 존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런 그저 평범한 존재가 절대 반지를 파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업을 수행한다. 그것도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여받았는데, 프로도는 그 운명을 거절하지 않고 순순하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아무나 할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하고 과업을 완수하게 만든 힘임을 보여준다. 그가 이룬 과업은 한국어로는 ‘절대’라고 번역이 된 영어로 ‘One’ 반지다. 모든 악의 역사가 그 절대 반지로부터 기원하니 반드시 폐기해야 할 대상이다.      


나는 그것을 니체가 말하는 ‘절대성’이라 봤다. 개체가 주체적으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정해져서 대대로 내려오는, 그 위에서 누구나 다 그 권위와 권력에 굴복하여 숭배하는 절대성 말이다. 니체는 그것을 종교로 보았는데, 그 안에는 전통, 관습, 이념, 이성, 과학, 체계, 제도 등으로 만들어진 이분법의 세계가 포함되는 것이다. 니체는 옳고 그름으로 규정하고, 다수가 지지하며,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그것과 다름을 억압하고 심지어는 광기로 몰아가면서 죽이려고 하는 그 절대의 원천을 파괴해야 함을 역설했다. 달리 보면 합리와 효율로 응축되는 근대성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주인공 프로도가 그 절대 반지를 파괴하자 그것을 토대로 그 위에 세워진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진다. 그리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미래란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의지로 다가가 지금 여기로 당겨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니체의 세계관이다. 그 미래는 멀리 있는 것이 지금 여기로 다시 회귀하여 오는 것이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힘에 의지하여, 고통을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현재 안에 다가오는 미래가 있을 뿐이다. 그 현실이 바로 삶의 냉정한 기준이어야 한다.      


과거 특히 진보의 길을 걸었던 사람일수록 그래야 한다. 과거에 자신이 가진 이론과 인식의 틀에 맞춰 길을 걸었지만, 이제 겪어 보니 그것이 현실과 맞지 않으면 삶을 위할 것이냐 이상을 위할 것이냐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전자라면 이론과 인식의 틀을 현실에 맞게 바꿔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늘리거나 줄인다. 아니 여전히 자신이 설정한 그리고 실패한 그 목표와 이상에 맞춰 현실을 비틀어버린다. 결국, 철저한 자기 방어로 현실을 맞추어 가는 셈이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삶이 허무하다. 현실을 직시하고 도래하는 미래를 힘으로 가져 와야 평화가 온다. 니체가 말하는 그 평화는 어느 한 쪽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영화에서 호빗이든, 난장이든, 인간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다 함께 사는 상태로 나타난다.      


난, 니체의 철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다. 그의 사상이 학문적으로 어떻게 분석되고 논증 되는지, 현실과 비추어 볼 때 어떤 함의가 있는지에 대해서까지는 잘 알지 못하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니다. 그의 사상이 봉건적이고, 반(反)민주적이고, 신분제를 옹호하며 심지어는 파시스트 지배를 옹호하는 혹은 옹호하는 것으로 악용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주장들이 있는 것은 안다. 그의 핵심 개념인 ‘영원 회귀’나 ‘위버맨쉬’가 과연 지금의 우리 시대와 맞는 것이냐는 주장도 만만치 않게 있다. 물론 그런 주장들을 전적으로 부인하고 반박하는 해석도 여전히 많다. 이런 틈바구니에 내가 끼어드는 일은 없다. 전문가가 아니라서 어리석은 것을 넘어 무책임하기까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그의 철학을 평가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여기에서 한 일은 그가 남긴 수많은 아포리즘으로 구성된 새로운 형식의 철학을 그가 원한 바에 따라 내 방식으로 해석해 보는 것이다. 예컨대, 난 그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영원회귀’를 역사적 개념이 아닌 철학적 개념으로 해석한 주장을 따른다. 그 위에서 나는 그 개념을 해석의 원(原)공간으로 삼아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내 방식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니 미래란 우리가 다가서기 나름이고, 그래서 영원이란 것도 ‘지금, 여기’의 현실일 뿐이라고 해석했다. 불교에서 붓다가 말하는 것을 그 제자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말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시작하듯, 내가 니체를 말하는 것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라는 것, 바로 그뿐이다.      


위버맨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해석했다. 흔히 초인이라 번역하는 전문가도 있고, 그것보다는 ‘극복하려는 자’로 번역하는 전문가도 있다. 이 가운데 나는 그를 ‘극복하려는 자’로 해석한 것을 따랐다. 그리고 내가 맥락적으로 해석하였다. 결국 나는 위버맨쉬란 정치적으로 뛰어난 지도자나, 동서양의 다양한 신화에 나오는 그 영웅일 수도 있고,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과 역경의 운명을 거역하지 않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 안고서 끝없이 극복해가는, 사회 내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어떤 미미한 존재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를 따랐다. 그러니 위버맨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정치의 문제도 아니고 사회의 문제도 아니다. 인간이라는 어떤 개인 존재가 어떻게 실존해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그가 겪고 극복해야 하는 일이 나라의 독립이나 민족의 해방 혹은 노동해방의 세상일 수도 있지만, 가족을 잘 이끌어가는 막내딸이 하는 소소한 일일 수도 있고, 선생님과 함께 인간적인 교실을 만들어가는 중2 남자 아이가 하는 작은 일일 수도 있다. 그 위버맨쉬는 스포츠맨일 수도, 연예인일 수, NGO 활동가 일수도 있다. 그 태생이 어떻든 간에, 왜 나에게 이런 막중한 과업이 주어졌는지를 불만하지 않고, 묵묵히 받아들이며 고통을 넘어서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위버맨쉬라고 난, 해석하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니체를 가슴에 품고, 니체의 눈으로, 살아가고자 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가 이 글을 쓰는 나나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나 모두 가장 풀어내보고 싶은 과제일 것이다. 이에 관해 난 니체가 가장 중요시 한 관점주의에 대한 동의로부터 출발하였다. 그 관점이란 마치 나의 전공인 인도 고대사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의미하는 다르샤나(Darshana)와 동일한 것이라서 나로선 아주 익숙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인도 연구에서 그 다르샤나는 철학이나 미학의 문제이지만, 결국 역사학 특히 역사 기술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를 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 관점 혹은 다르샤나에 관한 논쟁은 전적으로 우리가 하는 학문의 문제에 가깝다. 그것이 역사학의 문제든 철학의 문제든 봉건이든 민주든 그런 문제에 빠지는 것은 학자들이 즐기는 것으로 사실, 현실의 곁다리에 불과한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학문을 하는 것이 아니니만큼, 이 자리에선 그런 논쟁에 개입을 하지 않았다.      


"참된 것, 진실한 것, 무아적인 것에 귀속될 수 있는 모든 가치에도 물구하고, 모든 생명을 위한 더 높고 근본적인 가치는 가상에, 기만에의 의지에, 이기심에, 욕망에 있다고 생각해야만 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또한 저 훌륭하고 존중할 만한 사물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바로 겉보기에 대립되는 저 나쁜 사물과 위험할 정도로 유사하고, 또 연관되어 있으며, 단단히 연계되어 있고, 어쩌면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위험스러운 ‘아마도’에 마음을 쓰는 의지의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도덕의 계보》 2절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자. 그러면 어쩌면 지금 이후 미래까지 그 시간들을 내 힘으로 다가오게 할 수 있을 단초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지난 60여 년을 돌이켜 보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노력을 많이 했다. 한 때는 교회를 다녔다. 그때는 구원을 해주신 가없는 주님의 은혜를 찬양했고, 한때는 진보 정치 운동에 열심을 다하면서 살았다. 또 한 때는 출중한 연구 업적을 가진 교수 되고자 해 논문 생산에 모든 힘을 다해 정진하였다. 모두 뭔가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 정해진 목적을 향해 돌진해 살아온 날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정해진 틀 안에 사로 잡혀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틀은 수시로 바뀌지만 여전히 또 틀 속에 갇혀 있었다. 틀을 깨지 못하는 건 스스로 힘을 갖지 못해서였다. 힘을 기르지 못한 상태에서 늘 새로운 생각만 하니 공염불일 수밖에 없고, 다시 그 자리에 자석에 쇠붙이 붙듯 붙어버렸다. 개구리의 눈은 벗어났지만, 그 다음 단계인 힘을 기르지 못해서 종국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것이다.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이것이 충분조건으로 되려면 힘이 수반돼야 한다. 작은 인연의 관계로부터 더 큰 조직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목적이든 목표든, 합리든 공감이든, 공동체든 조직이든, 이타주의든 진보든 간에 모두 나를 틀에 가두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저항하고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그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도록 만드는 힘 말이다. 가족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간의 연과 끈으로 묶여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주체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요, 틀 안에서의 관계, 과거의 공유, 그런 것들은 가족을 빙자한 억압이다. 피와 공동체의 관계를 넘어서는 실천을 할 때 그 너머로 가는 과정에서 힘이 나온다. 그 힘을 쌓아가면서 천천히 하나 씩 자연스럽게 싸워나가야만 실존 인간으로 설 수 있다. 살아보니 그 싸움 가운데 가장 어려운 상대는 가족이드라. 니체의 눈으로 이 세계를 보는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은 가족 안에서부터 나를 세우는 것이 되리라 기대하고, 나아가 가족으로부터 시작해 그 밖의 더 많은 여러 관계들로부터 나를 돌아보는 일을 하고자 해서였다. 책을 쓰는 것은 나를 돌아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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