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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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1. 아드와이따Advaita. 不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습니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에서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오는 계절이지요. 그 서로 다른 계절은 별개의 다른 것일까요, 하나로 같은 것인데, 겉모양만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이와 비슷한 예로 좀 더 확장해보면, 밤과 낮을, 들 수도 있고, 늙음과 젊음을 들 수도 있을 겁니다. 한 발 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어쩌면 사랑과 미움을 다른 것으로 볼 수도, 결국 그 본질은 같은 것이라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삶과 죽음까지 확장해가면 너무 심한 것일까요?


고대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세계의 모든 것에는 어떤 본질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그 본질이 뭐냐고 물으니, 스승은 바닷물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그 본질이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그 맛을 보면, 소금이 있다는 것을 누구든 알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본질을 그 사람들은 우주적 차원에서 브라흐만brahman이라 합니다. 나중에 단독 주제로 좀 더 깊이 다루기로 하고, 이 자리에서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을 브라흐만이라 한다는 사실만 일단 기억하는 것으로 하지요. 달리 보이는 세상의 모든 현상은 결국 그 브라흐만이라는 본질이 현상적으로 달리 나타난 것이니, 그 다름이 다름이 아니라는 세계관입니다. 그 세계관에 의하면 모든 사물에는 본질이 있는데, 그것이 사물에 따라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나지요. 그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 즉 둘이 아니고 하나다, 라는 세계관을 아드와이따advaita 즉 둘이 아닌 것 즉 불이(不二)라고 말합니다. 아드와이따는 드와이따dvaita 즉 ‘둘’을 뜻하는 어휘에 아님을 의미하는 접두어 ‘a’가 붙어 ‘둘이 아님’을 뜻하는 산스끄리뜨 어휘입니다. 힌두교의 가장 유력한 학파인 베단따(Vedanta) 세계관의 토대가 바로 이 아드와이따, 둘이 아니라는 건 하나라는 의미지요. 힌두교의 일원론입니다.


아드와이따론을 체계화한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시지요. 8세기에 살았던 힌두교 최고의 철학자 샹까라짜리야Shankaracharya와 그 제자 간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샹까라짜리야는 세상 모든 것은 브라흐만이 있으니, 결국 모두 다 같다고 가르치니, 제자가 그 가르침을 굳게 믿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가 길을 가다가 코끼리가 아주 거칠게 맹렬히 자기에게 달려오는 것을 접했습니다. 코끼리를 모는 기수가 비키라고 소리쳤는데, 그 제자는 비키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브라흐만이니, 코끼리와 내가 같은 것인데, 왜 내가 피해야 하는가, 라고 했답니다. 당연히 코끼리에 크게 다쳤겠지요. 크게 다친 제자가 스승에게 크게 불평하면서 스승에게 따져 묻자, 스승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래, 맞다. 코끼리도 너도 브라흐만이니 같은 존재이지, 그런데 그렇게 보면, 그 코끼리 기수도 같은 브라흐만의 존재 아니겠느냐. 네가 진정으로 그 기수와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다면 피하라고 일렀던 그 기수의 말을 들었어야지."라고 설명했답니다. 그러면서 존재가 불이인 것은 절대 본질이지만, 세상에는 그 본질이 상대적으로 달리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거지요. 절대 진리만 보고 세상 속에 나타나는 그 상대적 현상을 무시하는 것은 진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라고 가르친 겁니다. 힌두교나 불교나 모두 해탈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나중에 따로 자세히 다룰 것이니 여기서는 간단히 ‘윤회를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정도 해두지요. 그런데 이 개념을 아드와이따 세계관으로 보면, 해탈이란 윤회와 다를 게 없다는 식으로 될 수 있겠지요. 그 뿐이겠습니까? 선과 악, 미와 추, 많음과 없음 등 둘로 나누는 건 모두 다르지 않다는 것이 되니, 그 세계관의 폭이 얼마나 넓고 깊겠습니까? 둘이 아니고 하나지만, 그렇다고 그 현상의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즉, 그래도 둘은 둘이다, 라는 세계관. 바로 이것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음’의 토대지요. 궤변인 듯 아니듯, 오묘한 세계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대 힌두 세계관에 의하면 존재에 변하지 않는 절대 본질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변하여 나타나는 상대 현실을 부인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유서로 남긴 말은,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라고 했습니다. 그 본질이 같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죽음을 삶과 같이, 삶을 죽음과 같이 초연한 자세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치는 것이지, 살지 말고 죽으라는 건 아니라는 거지요. 진보 운동가들이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빛은 결국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아무리 칠흑 같은 어둠이라도 결국 이겨낸다는 결연한 의지를 말하는 거지요.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결국 빛은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아마 세상을 비관하는 사람은, 빛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말하겠지요. 둘 다 맞는 말입니다.


이 명구들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뜻은, 세상을 칼로 두부 자르듯, 옳고 그름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만 사고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더 깊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지요, 선과 악으로 나누어 편을 가르고 사는 삶, 과연 현명한 것인지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그런 가름과 나눔은 옳을지언정 현명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13.7./25.09.21.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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