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2. 깔라 Kala 시간
현재 인도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쓰는 힌디어에서는 어제와 내일의 단어가 같습니다. 둘 다 깔kal이라 합니다. 그런데 힌디어의 조상인 고대 언어인 산스끄리뜨어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중세 이후 고대에 있었던 어떤 시간 개념이 구체화하는 차원으로 동일 단어로 바뀐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고대 언어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 단초로서의 어떤 개념이 있었을 텐데, 그게 뭘까, 하는 궁금증이 생기지요? 이 문제는 지금 우리가 주제로 삼은 인도인들의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이라고 제가 이름 지은 소위 상대주의 세계관의 토대가 되는 그들의 시간관과 관련 있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흐르지만,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습니다. 같은 고대의 그리스인들은 시간이란 일직선으로 흘러 돌아오지 않고 사라져버린다고 생각했으니, 사뭇 다르지요. 그리스 사람들은 물리적이고 양적인 시간의 개념 즉 크로노스와 의미 있는 어떤 시간의 개념 즉 카이로스라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었지요. 이와는 달리 고대 인도는 그런 외형과 속 의미의 서로 다른 두 개념을 따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시간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건, 순환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어제와 내일은 모두 현재가 아닌 것으로 둘이 같은 것이라고 인식해, 같은 단어로 묶은 거지요. 내일이나 모레를 우리는 미래라는 범주로 묶고 어제와 그제를 과거라는 같은 범주로 묶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시간이란 순환하기 때문에 현재의 밖에 있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고 여긴 거지요. 그러다 보니, 과거와 미래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현재란 엄격히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순환 흐름 속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과거가 미래고 미래가 과거이니, 현재는 과거도 되고 미래도 된다는 생각이지요.
그 거대한 순환의 시간 속에서 모든 존재는 이전 글에서 말씀드린 본질이 아니고 변화하여 나타난 현상 즉 사라져버린 그리고 앞으로 사라져버릴 환(幻)으로 보는 겁니다. 이를 그들은 마야(maya)라고 부릅니다. 마야에 관한 건 따로 나중에 다루니, 여기에서는 아주 간단히 언급만 하지요. 널리 알려진『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 「찬기파랑가」에서, 세상은 덧없고, 사람의 목숨은 아침 이슬과 같다는 탄식이 바로 '마야' 세계관에서 나온 겁니다. 불교는 고대 힌두교 세계관 위에서 만들어지고 변화한 종교, 결국 우리 선조들은 힌두교 세계관 속에서 살았지요.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힌두교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만큼 비슷하게 된 후기 불교를 보면 이런 현상이 잘 드러납니다. 거기에는 마하깔라(Mahakala) 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우리 고대 불교에도 많이 나타나는데, 대흑천(大黑天)이라고 부르는 신입니다. 힌두교의 파괴의 신 쉬바(Shiva)의 불교 버전이지요. 이 신의 이름 뒷 부분인 '깔라'가 곧 시간인데, 힌두교의 쉬비나 불교의 대흑천이나 모두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니, 결국 깔라 즉 시간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시간을 죽음이라고 본 건데, 그 죽음이라는 것을 달리 말하면 삶이 되는 것이니, 죽음과 삶, 파괴와 창조가 순환하여 결국, 같은 것이 되는 논리로 귀결하지요.
고대 힌두교에는 세상을 주재하는 거대한 신이 셋 있습니다. 브라흐마Brahma, 비슈누Visnhu 그리고 쉬바라는 신이지요. 브라흐마는 창조를 맡아 행했고, 비슈누는 세계를 보존하는 일을 하는 신이고, 쉬바는 세계를 파괴하는 신입니다. 그런데, 마치 기독교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같은 것이라고 하는 삼위일체설이 있듯, 인도인들은 이 세 신이 결국 같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창조는 결국 파괴를 위해 일어난 일이고, 파괴란 보존하기 위한 것이며, 보존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새로운 창조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러한 순환의 시간 개념 안에서 그들은 세상 만물은 윤회한다고 생각했고, 그 윤회라는 것은 끝도 한도 없이 영원히 벌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에 따라 사람들은 다음 생에 좀 더 좋은 생으로 윤회를 하기 위해서는 힌두교 신학자가 정해놓은 어떤 사회적 법도를 잘 지키라는 현실 사회 중심의 생각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윤회라는 건 모두 무의하고 덧없는 것이므로 그 윤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해탈의 관념도 생기기도 하지요. 이러한 사회적 의미는 모두 이후 시간에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도인이 가진 시간관, 즉 시간은 흐른다, 그런데 순환하여 돌아온다는 관념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그런데 그 시간의 크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것이어서, 우리 눈에는 직선적인 것으로 보일 뿐이지요. 지구라는 거대한 원 안에 존재하는 모든 직선은 곧 곡선이라는 생각으로 그리면 저 그림에 그려진 저 선도 순환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시간의 흐름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지만, 곧 새로운 삶을 행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그린 겁니다. 추상화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사실을 해석하고 거기에 의미 부여와 성격 규정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보는 사람마다 그 해석이 다르고, 심지어는 그리는 이와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게 추상화입니다.
13.9./ 250921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