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3. 아미따 Amita 無限
고대 인도인들은 시간을 끝없는 윤회 속에서, 흘러갔다 다시 돌아오고, 그 속에서 멸(滅)했다가 다시 생(生)하는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무한대지요. 이 무한대, 라는 개념, 우리 마음 속에 깊이 잠겨 있습니다. 오래전 어떤 가수가 부른 ‘사랑’이라는 노래에 ‘사랑은 머물지 않는 바람 무심의 바위인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어둠의 분신인가’라는 가사는 60대 이상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그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무한대 개념을 그들은 아미따(amita)라고 합니다. 원래 힌두교에서 나온 개념인데, 나중에 불교에서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요.
‘아미따’는 산스끄리뜨어로 ‘부정(不)’을 뜻하는 ‘a’와 ‘재다’, ‘측정하다.’의 뜻을 가진 미따(mita)가 합쳐진 어휘인데, 잴 수 없는, 측정할 수 없는, 이라는 뜻으로 보통 ‘무한(無限)’ 혹은 ‘무량(無量)’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무한대라는 수의 개념은 윤회라는 그들의 종교적 세계관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첫 번째 글에서 말씀드린, 절대 본질인 브라흐만 그리고 그것이 신으로 나타난 절대 신, 이슈와라(ishvara)의 속성을 설명할 때 이 ‘무한’의 개념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힌두교 최고 경전 중 하나인 『바가와드 기따』에서 끄리슈나(Krishna) 신은 자신을 무한한 형태의 우주적 존재로 말합니다. 모든 한정 짓는 것을 초월한 신성 즉 근원적 실재이면서 우주적 절대 신이라는 겁니다.
이 아미따가 불교에 와서는 뜻이 조금 달라집니다. ‘아미타불(佛)’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보셨지요? 『삼국유사』에 많이 나타나는 이 아미타불은 끝이 없는 빛을 의미하는 아미따바(amitabha)와 끝이 없는 수명을 나타내는 아미따유스(Amitayus)로 나타납니다. 『아미타경』, 『무량수경』 등 정토 신앙의 경전에 많이 나타나는데, 그 시대 사람들은 이 아미타불을 무한한 자비, 무한한 지혜, 무한한 생명의 상징으로 믿고 찬양하였습니다. 아미타불은 중생을 극락정토로 인도해주는 신의 역할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바로 무한대의 대자대비(大慈大悲)를 가지고 있어서지요. 그 무한대의 대자대비란, 대부분의 기독교에서 규정하는 것과 같은 구원을 받기 위한 어떤 조건 즉 예수를 유일한 크라이스트 즉 구세주로 믿고 그를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과 같은 어떤 전제를 두지 않고서 무조건 구원해줌을 의미합니다. 아미타불은 아무런 조간도 없이 그냥 그를 사모하거나, 그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다른 어떤 방식으로라도 그에게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모두 무조건 극락정토로 구원해준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조건적 구원관이 옳은지, 불교의 무조건적 구원관이 옳은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새삼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는 없겠지요.
대자대비의 아미타불은 종교학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신입니다. 힌두교에서의 비슈누 같은 우주를 주재하는 절대 주(主)는 아니지만, 인간의 구원을 담당하는 신의 기능을 합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붓다가 규정한 궁극인 세상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가 팔정도에 따라 깨달음을 얻어 니르와나(涅槃)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궁극이었지만, 이제 대승불교로 바뀌면서 최고 가치는 신에게 간구하여 극락에 윤회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해탈이라는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수행의 길을 가지 않고, 그 무미건조한 열반의 세계를 추구하지 않게 된 겁니다. 대신 재미있고 즐거우며 금은보화와 산해진미가 넘쳐나는 화려한 극락을 널리 추구하게 됩니다. 불교의 교리가 크게 변한 거지요. 힌두교에서는 그 무한성이 절대 변하지 않는 본질로 절대 신의 개념으로도 발전하고, 또 무한대의 방편이라는 개념도 다른 쪽에서 크게 발달하였는데, 불교에서는 절대 신으로서의 개념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중생과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방편이 무한대로 늘어나는 변화가 생겼을 뿐이지요.
아미따, 라는 무한대의 개념은 인도 사회가 어느 하나의 교리를 유일 진리라고 믿는 종교 문화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옳고 그르냐, 어느 길이 참이고 어느 길이 거짓이냐에 대한 싸움이 크게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택할 뿐, 남에게 이 길이 옳으니, 이 길을 가야 한다, 저 길은 삿되니 그리 가면 안 된다, 하는 이분법의 논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에서 불의한 것이 횡행하고, 악이 판을 치더라도, 그저 내가 가는 길에만 만족하며 사는 문화가 오랫동안 주류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 소위 열린 세계관은 종교에서는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기회를 주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신앙의 일에서만 그러했지요. 사회 안에서 약자를 억누르는 불평등과 착취 그리고 가진 자들의 압제에 관해서는 입을 닫게 했지요. 반면에 기독교나 서양에서 발달한 특정 조건으로 한정된 세계관은 불의와 불평등에 대해 줄기차게 저항하게 하는데 거름이 되었지만, 나와 남을 가르고, 남을 악으로 규정하여 심지어는 적을 몰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습니다. 어떤 세계관으로 가느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전적인 자신의 주체적 선택의 문제입니다.
13.2./250921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