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I.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4. 깔빠 Kalpa 劫
힌두 세계관에서 시간은 흐르는데, 흘러서 가버리는 게 아니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는 생각,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무한’의, 그것의 구체적인 개념에 들어보셨습니까? 우리말로 ‘겁’이라는 것인데, ‘겁’ 앞에 ‘영’(永)을 더해 ‘永劫’이라 쓰는 어휘가 바로 그 무한대의 시간 단위지요. 인도인들의 세계관이 우리에게 전해져 우리 세계관이 되었다는 거지요. 인도 고대 산스끄리뜨어로 깔빠 kalpa라고 하는 것을, 음차해서 ‘겁’이라 썼답니다. 물론, 불교를 통해서 들어온 거지요. 당시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뜻을 번역하지 못하고 음을 번역하여 사용한 겁니다. 이후 ‘겁’은 우리 세계관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어, 지금에 이릅니다.
신화 이야기 하나를 들어보시지요. 세상이 아직 창조되지 않은 초기의 혼돈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한한 우주 바다가 있었고, 그 안에 비슈누 Vishnu 신이 거대한 뱀 위에 눕습니다. 그리고서는 잠을 잡니다. 그 잠은 우리가 자는 단순한 휴식과 멈춤의 잠이 아니고 우주 창조를 위한 꿈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내 비슈누의 배꼽에서 한 송이 연꽃이 피어납니다. 이 연꽃 위에서 브라흐마 Brahma라는 신이 태어나는데, 그가 창조의 사역을 맡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창조주가 맨 먼저이고 그리고 예수가 다음 순서인데, 힌두교에서는 그 순서가 다르지요? 이런 것은 고대 인도인들은 세상 유지의 일을 세상 창조의 일보다 더 우선하는 것으로, 생각했단 논증이 되지요. 그래서 브라흐마는 비슈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세계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만들어냅니다. 바다, 산, 강, 땅, 별, 시간 그리고 모든 생명체 등을 만들어낸 거지요. 이 모든 것은 비슈누가 행한 꿈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창조된 세계는 유지, 지속되다가 파괴되고 다시 창조되고, 유지되다가, 시간이 다하면 파괴되고 다시 또 창조되고. 이 과정은 무한히 반복됩니다. 여기에서 비슈누가 한 번 눈을 감고 뜨는 그 짧은 시간을, 우리가 사는 인간 세계의 길이로 계산하면, 43억 2천만 년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낮의 시간이니, 밤도 같은 만큼의 시간이 있습니다. 둘이 합쳐서 64억 4천만 년이지요. 이걸 브라흐마 신의 하루, 인간 세계의 개념으로 하나의 깔빠, 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겁이 생성되고 이내 소멸하면, 그보다 더 큰 겁이 생겨나고, 소멸하고, 그런 과정이 영원히 끝도 한도 없이 계속됩니다. 겁은 더 큰 겁으로 이어지고 또 더 큰 겁으로 ... 이게 겁입니다.
여기에서, 43억 2천만이라는 숫자가 좀 생경하지요? 고대 인도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숫자는 상징인 경우가 많습니다. 숫자의 상징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12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12진법을 사용하였으니, 12는 가장 많은 수를 의미하지요. 그 수가 세계의 안정된 구조를 이루는 3의 상징 수와 만나 36이 되고, 이 둘이 곱하여지면 432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숫자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한대로 긴 시간이라는 거지요. 지금의 우리가 계산하는 디지털 방식의 딱 정확한 그 숫자가 아니고 아날로그 개념이지요. 그러니 겁은 곧 43억2천만이 아니고 무한대라고 이해하는 게 더 좋습니다. 이 무한대로서의 43억 2천만이라는 숫자의 개념을 고대 인도의 신학자들이 고안하긴 했는데, 그걸 그대로 당시 백성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관련하여 여러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 속에서 두루뭉술하게 그 뜻이 전달됩니다. 처음 인도에서 만들어져, 각 지역으로 전달되고, 불교가 그 일에 합세하여 인도 바깥으로 전달되는데, 지역에 따라, 문화권에 따라 그 이야기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맨 첫 글에서 말씀드린 본질은 같고, 현상은 달라지는 게 그들의 세계관이니, 현상이 달리 표현되는 건 쉽게 받아들여진다는 겁니다.
베다를 비롯한 오랜 신화에서 형성된 깔빠의 개념은 중세 이후 여러 설화 전통 속에서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이야기로 바뀝니다. 여러 구전 설화 중에 대표적인 것이 새와 깃털의 비유지요. 이런 이야기입니다. 옛날 옛적, 한 제자가 스승에게, 깔빠라는 시간은 얼마나 긴지 물으니 스승이 답하기를 아주 먼 북쪽 히말라야 꼭대기에 거대한 바위 하나가 있는데, 100년에 한 번씩, 아주 부드러운 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바위 위에 깃털 끝을 살짝 스치고 간단다.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 그게 깔빠다. 이런 우화는 세계 곳곳으로 널리 퍼집니다. 불교를 통해서요. 우리에게는 이렇게 알려졌지요. 천상의 선녀가 천년에 한 번씩 이 땅으로 내려오는데, 그 고운 선녀의 옷깃이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를 스치고 가는데, 그 옷깃이 닿아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란다, 라는 이야기요. 432라는 숫자는 사라지고, 그 의미는 그대로 전달이 되었지요?
그런데 이 겁은 인간의 계산에서 나온 개념이고, 브라흐마 신의 입장에 서서 보면 순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 번째 글에서 말씀드린 아드와이따 즉 불이(不二)의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그러면, 무한대의 겁은 순식간의 찰나가 되는 겁니다. 다음 글은 이 ‘찰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13.3./250922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