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I-5. 끄샤나Kshana 찰나


‘겁’이 고대 인도의 산스끄리뜨 어휘 깔빠 kalpa를 음차하여 우리말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로 ‘찰나’도 산스끄리뜨 끄샤나 kshana를 음차한 것입니다. 우리는 숨을 한 번 쉬거나 눈을 한 번 깜빡거리는 기간 정도로 짧은 기간을 순간, 순식간 등으로 표현했는데, 그것과 같은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이 ‘찰나’는 궁극적으로 깔빠 즉 겁과 다르지 않은 시간입니다. 끝이 없는 무한이 순간의 유한과 같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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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찰나’를 실제 물리적 차원의 시간 단위로 국한하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본질과 현상의 생멸에 관한 인식 차원으로 생각했지요. 유한한 찰나는 무한으로 이어지면서 변화하고 또 변화하고 또 변화하기 때문에 가장 작은 변화의 단위인 찰나와 가장 큰 변화의 단위인 겁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겁니다. 변화가 시작하는 처음이나 그 변화가 끝나지만, 그 끝에서 다시 새로운 변화가 시작하니, 그 둘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이를 다른 말로 풀면, 각 순간순간이 전체 영원을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를 불교에서는 찰나 속에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생기고 사라진다고 설명하지요.


좀 더 쉽게 비유적으로 말해볼까요? 영화 [관상]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송강호가 분한 그 주인공 관상쟁이가, 자기는 파도만 보았지, 그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을 보지 못했다고 탄식하는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바다와 파도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다는 항상 존재하는 겁의 표상이고, 파도는 순간순간 생겨났다가 이내 사라지는 찰나를 표상하는 것이지요. 순간의 현상이 곧 겁의 본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바다만 보고 파도를 보지 못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는 것이고 역으로 파도만 보고 바다를 보지 못하는 것도, 지혜롭지 못하다는 의미지요. 그러니 영화 [관상]의 그 말을 힌두교의 아드와이따(불이)로 풀면, 찰나의 파도를 보았지만, 그 현상을 일으키는 겁의 바다를 보지 못했으니, 이치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본질의 거대한 순환이 현상의 변화로 나타나는 그래서 우리 앞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영원하지 않다는 ‘무상(無常)’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러한 덧없음의 감정은 인도에서도 그랬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문학과 예술을 낳았습니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하도 많아서, 이 자리에서는 조금 달리 볼 수 있는 이야기 하나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생각해 보지요. 인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관에서 우리 인간 세계에서의 시간과 천상에서의 시간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바로 앞장 깔빠(겁)에 관한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인간 세계의 겁이 창조주 브라흐마의 시간에서는 찰나밖에 되지 않는다는 그런 개념과 같은 것이지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는 바로 이런 시간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계의 남성과 천상계의 여성이 만나 가정을 이루지만, 그 행복은 결국 짧고 덧없는 것으로, 끝나버린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선녀는 천상계의 존재이니, 그 세계의 시간 속에 존재할 뿐, 그 인연이 인간계에서도 똑같이 유지될 수 없다는 개념이 깔린 겁니다. 선녀가 인간 세계에서 쌓은 행복은 잠시 머물, 찰나의 일이라는 의미지요. 즉 천상에서와 같은 영원이라는 것이 지상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교훈으로 가르쳐주는 겁니다.


그렇지만, 역의 논리로 생각하면, 이 찰나라는 개념을 이렇게 덧없음으로만 보지 않고,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찰나를 겁 즉 영원함을 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볼 때, 시간이 쏜 화살같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는 것만 생각할 뿐, 앞으로 내 눈 앞에 펼쳐지는 순간순간이 무한대의 가능성을 지닌 것이라는 생각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찰나가 곧 겁이라는 세계관을 허무주의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찰나가 다름 아닌 겁이라고 생각하면, 그 세계관은 매우 실천적인 세계관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우주를 담고 있다는 세계관과 같은 것이 된다는 거지요.

이러한 찰나와 겁의 관계는 현대 사회에 들어와, 개인과 사회, 미시와 거시, 구조와 탈구조 혹은 해체 등의 포스트모던 세계관과 관계 맺으면서 현대적 가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현대인의 소외 문제를 탁월하게 다룬 소설가 김승옥의 ‘차나 한잔’은 이 문제를 다른 좋은 문학입니다. 1960년대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일어나는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작은 개인이 겪는 실존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 속에서 ‘차나 한잔’이라는 일상성은 겉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찰나의 행위처럼 간주 되지만, 그 속에는, 그 개인에게는 그 어떤 우주보다 더 깊은 내면의 갈등이, 영겁과 같이 길고 우주만큼 깊고 무거운 것이라는, 사상이 잘 녹아 있지요.


다수의 가치가 소수의 가치보다 더 가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개인이 사회나 국가나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도 아닐 거고요. 나 자신이 존중받을 때, 우리 사회가 조화롭고, 그것이 곧 사람 사는 세상이 될 겁니다. 찰나가 곧 겁이라는 겁니다.


13.5./2025.09.22.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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