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삶

: 추상화와 함께 읽는 힌두교와 불교 세계관

by 이광수

I.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수레바퀴

6. 산사라 Sansara 윤회


산사라 Sansara라는 말은 윤회이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윤회하지 않는 세계란 존재할 수 없으니, 이 세계가 윤회고, 윤회가 세계지요. 생명이 죽으면 다른 생명체로 태어난다는 개념은 고대 인도밖에 없었습니다. 그 기원이 인더스 문명에서 시작되는 것인지, 이후 유목민으로 인도아대륙으로 들어온 아리야인이 가지고 들어온 건지는 정확하게 밝혀낼 수 없지만, 아무튼 인도의 근본 세계관이지요. 아리야인과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 땅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이 천 년 동안 접촉하면서 서로 다른 세계관을 종합적으로 만들어낸 우빠니샤드에 이 윤회 관념은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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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빠니샤드에 나타난 몇몇 구절을 보면, 윤회란 이 세계에서 베다를 듣고, 그것을 어떻게 행했는지에 따라 다시 태어난다, 변하지 않는 본질인 영혼, 아뜨만 atman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또 그다음 세계로 돌면서 다시 태어나니, 이 몸은 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선한 행위는 좋은 몸을 만들고, 악한 행위는 나쁜 몸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윤회란 결국 사회 행위에서 규정된 선과 악을 장려하거나 규제하기 위한 세계관이 되는 것이지요. 윤회라는 것이 종교적 의미로는 끝없는 생의 반복으로 이해되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거나 그에 따라 좋은 몸으로 태어나는, 즉 내세를 중시하는 데 의미를 두지만, 사회적으로는 신학자가 규정한 율법 도덕에 순종하여 사는 현실주의의 의미가 훨씬 중요한 것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신학이 반영된 수없이 많은 신화 이야기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 하나를 들어보시지요. 하늘에 있는 신들의 왕인 인드라 Indra가 한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교만하기 이루 말할 수 없자, 신선 한 사람이 그의 궁전에 나타나 침묵 가운데 개미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 개미들은 모두 이전 생에서 인드라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 역시 당신처럼 교만했고, 결국 죽고, 다시 태어난 게 개미로였다고 가르침을 내리지요. 그러자, 인드라는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즉 윤회와 무상함을 깨닫게 됩니다.


윤회 개념은 힌두교를 다신교로 만드는 결정적인 일원론 세계관으로 기능했습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주요한 세 신이 있는데 비슈누Vishnu는 그 가운데 세계를 유지 보존하기 위해 인간 세계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서로 다른 몸으로 태어나는 화신을 수도 없이 가집니다. 무한의 겁이 반복되면서 세계는 멸하게 되는데, 홍수로 멸할 때는 물고기의 몸으로, 법이 무너지고 인륜이 무너질 때는 위대한 왕으로 태어나지요. 사실 그 화신들은 각 지역에서 서로 달리 믿고 숭배하는 각각의 다른 신이었는데, 모두 세계를 구하는 성격을 가진 것들이라서 비슈누 신의 화신으로 편입된 겁니다. 그러니 그 화신의 수는 끝없는 윤회 속에서 무한대로 많게 되고, A가 B고, B가 C고 ... 하는 식으로 모든 신이 같은 신이 되는 겁니다. 영화 [아바타]의 이야기는 바로 이 윤회의 원리 속에서 미래에 새로 태어나는 화신을 모티프로 삼아,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그러하니, 인도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이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그렇게 계시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살아 있는 신 행세를 하는 건, 별로 이상하게 취급받을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 역사에서도 그런 건 나타납니다.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주장했다는 건 바로 힌두교와 다르지 않은 윤회관이 불교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퍼진 이야기지요.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누군가가 재림 예수라 하면, 그건 이단으로 취급받기 일쑤입니다. 그 존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윤회와 같은 세계관이 없는, 즉 시간관이 근본적으로 다르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윤회는 힌두교에서는 피할 수 없는 세계 운항의 원리로 규정하지만, 일부에서는 수행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속세에 사는 사람들은 힌두교 신학자가 정한 도덕 율법에 맞춰 살고, 그 결과에 따라 이 윤회의 법칙 안에서 더 좋은 세상으로 태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하지요. 불교에서는 이와는 약간 다른 식으로 관점이 변합니다. 붓다는 윤회는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 윤회 행위가 발생하게 되는 사회적 행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가르쳤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르침은 크게 변했고, 새로운 해석의 대승불교에서는 굳이 탈속하지 않고서도 사회의 율법 도덕을 잘 따라 살면, 그 업보로 다음 생에 좋은 몸으로 태어나는 것을 바람직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힌두교와 다른 것으로 출발했다가 같은 것이 되어버린 거지요.


윤회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콩 심는 데 콩 나고, 팥 심는 데 팥 난다는 식으로 세계의 현상을 이해합니다. 대체로 그들은 ‘인과응보’의 원리는 믿지만, ‘지금 여기’라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위는 잘 하지 않습니다. 대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갈등과 반목 그리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는 경향도 현저하게 적지요. ‘지금 여기’에서 피를 흘리고 싸우면서 얻어낼 것인지, 이치를 듣고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해결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전자가 너무 심하면 후자의 경향을, 후자가 너무 심하면 전자의 경향을 더 보태면서 평형을 유지하려 해야 하겠지요. 어느 한쪽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그들은 그렇게 산다는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13.9./250922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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