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가을밤>
1. 비 오는 가을밤 나는 어디로 갈까?
향긋한 버터냄새가 가득한 빵을 굽는 상상을 하며
나섰다가 몸도 마음도 한껏 젖고 돌아왔다.
오늘 같은 날.
막걸리 집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지짐을 찢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었지만 친구의 연락을 홀로 삼키며, 내가 향한 발길은 초원막걸릿집도 아니고 어울림국숫집도 아닌 #진주문고였다.
퇴근길 굶주린 배를 붙잡고 신영인 작가의 북토크 현장에 도착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자리를 채우셨다. 처음 뵙지만, 진행을 맡은 윤은주 관장님(꿈꾸는 산호 작은 도서관) 출판사의 이지순 대표님, 편집을 맡으신 성윤석 시인님 까지 뵐 수 있었다.
2. 문장을 굽는 신영인 작가
원고지의 네모 칸을 붉은 담장이라 표현한 부분도 기억에 남았지만,
시집을 삼켜버린 문장들을 만날 때마다 감탄했다.
기회가 되면 작가를 만나고 싶었다.
분명 산문인데 왜 그렇게 시적으로 문장들을 흠뻑 적셔 놓았는지? 그 여백이 궁금했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많이 울었으니, 여러분이 울 공간을 두었다.”
시적인 문장은 의도한 것은 아니다. 시를 굉장히 사랑해서 문장이 닮아 갔다. 작가는 힘든 시기를 견디기 위해 1,000여 편의 시를 읽고 필사를 했다고 한다.
하루 12시간 일을 하며 책을 읽기 위해 앞치마에 넣어 둔 시집들.
그리고 그 문장들을 잊지 않으려고 적어 내려간 공책들.
결핍의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과 마주했다고 한다.
자신과 가장 닮은 책 페이스트리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3. 작가에게 쓰는 의미
어떻게 무엇을 쓸 것인가? 는 어떻게 살 것인가? 와 같은 의미였다.
쓰기를 통해 만나기를 원했다.
지하실에 잠겨놓고 두고 있었던 나. 힘들고 흔들릴 때 나오고 있다.
쓰기를 통해 지하실에서 꺼내 햇빛에 먼지를 털고 말린다.
구석에 있는 더러운 것을 꺼낸다. 쓰기는 나와 직면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꺼내며 백지를 들고 사랑의 글을 쓴다는 작가였다.
<144겹의 반죽과 70편 정도의 시>
페이스트리는 작업이 오래 걸리고 과정이 까다로운 빵이다. 직사각형으로 펼친 반죽 위에 같은 두께의 버터를 넣어 접고 누르고 냉장 휴지했다가 다시 누르고 접고 차게 유지하는 일을 반복해서 백사십 장이 넘는 얇은 겹을 만들어 굽는 빵이다. 144겹의 반죽을 밀 때 그 두께는 70편 정도의 시를 담은 시집과 비슷하다.
페이스트리를 만드는 일은 글을 쓰는 일과 많이 닮았다. 세상으로부터 나를 분리해 낱낱이 펼쳐 세웠다가 다시 세상에 던지는 일이다. 오래 걸리고 춥고 지독히 외롭다. P.35
그녀의 앞치마에 항상 꽂혀있는 시집처럼 오늘도 오븐 앞에서 맛있는 문장을 구워내고 있다.
도서 : 페이스트리
저자 : 신영인
출판 : 뜻있는 도서출판
그녀의 문장은 한 편의 시 같기도 편지 같기도 하다. 아름다운 문장들 속에서 살짝 설렌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런 산문이다. 애틋하기도 하고 다정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살갑기도 하다.
접히고 눌리고 차가운 어둠 속에서 자신을 견디다가 가슴에 144겹의 이야기들을 잘 빚어 오랜 시간 동안 구워 낸 책이다.
세상의 아름다움 밖에 사는 곁가지들을 붙들고 나는 붉은 선 가장자리에서 움찔거리다 첫 장을 뒤집었다. 무단횡단! 길을 뒤집고 정해진 칸을 글자로 밟아 넘는 일은 일탈이었을까. 결국 칸을 단 하나도 채우지 않은 채 뒷장에 빼곡히 쓴 편지로만 한 권의 원고지를 다 쓰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원고지를 뒤집어 편지를 쓴다. 담을 넘던 열세 살의 아이는 보내지 못할 편지들을 쓰다가 아직도 칸 밖에 산다.
어느 날엔 붉은 담장을 넘다 올려놓은 유리를 깨뜨리기도 하였지. 와장창 소리가 천둥 친 날에는 밤새 칸 밖을 서성여도 문장에서 유릿가루가 빛났다. p.18
『Pastry(페이스트리)』는 수학도에서 성악가로 성악가에서 제빵사로 이제는 에세이스트로 독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영인 에세이스트의 첫 산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