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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토 Jun 09. 2019

평범한 사람들로 직조한 대한민국

피프티 피플(2016)을 읽고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설 피프티 피플(2016)에 등장하는 쉰한 명은 한마디로 평범하다. 젊은 부부부터 늙은 신사까지 살아온 궤적이 다르고 타고난 성품이 다르다지만, 그들 모두 매일 지하철이나 마주할 법한 평범함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평범함은 묘한 동질감을 불러일으키고 귀를 기울이게 한다. 자기 사진이 박힌 주민등록증을 들고 대한민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법한 이들은 기승전결이 뚜렷한 삶을 사는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다. 그보다는 보통 편리하게 사용되는 용어인 '우리'라는 집합체에 가깝다. 모호하고 주관적인 표현이지만 더 적절한 비유는 없을 것 같다. 쉰한 명의 사람들은 크든 작든 '우리'처럼 고민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가 그랬을 것처럼 아파하고 '우리'가 했을 법한 모습으로 행동한다.


작가 정세랑은 이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미루고 조용히 관찰하는데 집중한다. 전지적인 위치에 있지만 각 인물의 시점에 이입하다 보니 실제 서술 내용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가깝고, 가끔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온정적으로 비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인턴을 쥐 잡듯 잡는 꼰대의 중얼거림도 가감 없이 옮기고, 한평생 딸을 학대한 어머니에게 제삼자의 시선을 통해 좀 더 후한 평가를 내려주기도 한다. 이토록 작가가 한 명 한 명에게 이입하여 밉지 않게 서술하는 이유는 그들 역시 사회의 일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해 못할 사람은 없다는 말을 이젠 믿지 않지만, 적어도 그 여부는 들어보고 나서야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작가는 타인과 타인의 사이에서 객관적이고 충실한 관찰자로서 존재한다.


그렇게 조용한 관찰자가 평범한 사람들을 엮어 만드는 것은 작은 대한민국이다. 쉰한 명이 전하는 쉰한 개의 이야기는 서로를 참조하고 입증과 반증을 되풀이하면서 생명력을 얻는다. A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B의 이야기에서 재현되고 C가 겪은 일이 D의 시점에 새로이 담길 때 개인의 소소한 사연은 실체적 진실의 뿌리가 되고 사회적 담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단서가 된다. 소설은 가습기 살균제 사고 등 광범위한 이슈를 제시하지만 어떤 증거나 대책을 제시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는 쉰한 명의 입을 빌어 멀게만 느껴지는 이슈에 죽고 사는 사람들의 얼굴이 '우리'와 닮았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평범함이라는 보편성을 바탕으로 연대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 보편성이라는 것은 정말 존재할까?


작가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면식도 없는 평범한 이들이 힘을 합쳐 불타는 영화관을 탈출한다. 각자의 삶의 궤적이 만든 습관이 모여 자물쇠를 따고 물탱크를 푼다. 주저앉은 자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닥터 헬기에 구조용 사다리를 매단다. 건물은 흉물이 되어 철거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물 같은 기적이다. 과연 작가의 긍정적 전망은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을까? 작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러 의문이 들지만 비교적 확실한 것도 있다. 사회의 문제 해결의 동기도 사람이고 그 주체도 사람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기억해야 하고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보편성을 바탕으로 한 연대든 무엇이든 회복해야 한다. 사회는 어젠다가 아닌 사람이 모여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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