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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즈맨 Sep 16. 2020

나의 라임 오렌지 생각

티끌모아 에세이

거친 하품과 함께 잠에서 깬다.

잠에서 깨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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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암 -


불안정한 와이파이 환경에서의 유튜브 영상처럼 온전히 정신이 들기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나라는 인간의 기본 세팅은 게으름이다. 반드시 아침에 몸을 움직여줘야 생산적인 하루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되도록 아침에 러닝을 뛰려 한다. 뭔가 생각을 해봤자 하기 싫다는 생각만 하게 되므로 생각할 시간 없이 행동들을 이어나가야 된다. 생각 없이 저스트 두 잇. 나이키 카라티와 바지를 입으며 '참 잘 지은 슬로건이야'라고 생각한다. 광고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저 슬로건은 더욱 대단하게 느껴진다. Just Do It. 단지 세 단어로 나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니.


어제의 밤이 해가 없는 시간 동안 열일했다. 이제 꽤 선선하다는 느낌이 든다. 구름의 모양도 바람의 방향도 여름의 품을 떠났다. 이제 가을의 것이다. 구별되는 공기가 피부에 와 닿는다. 사람 없는 곳에서 잠시 마스크를 벗고 만끽한다. 입과 코로 들어오는 신선함을.


이런 날씨라면 평소보다 더 기분 좋게 뛸 수 있다. 역시 가을이 좋다. 나로서는 이 계절의 단점을 찾을 수가 없다. 앞서 말한 시원함은 나의 촉각을 만족시킨다. 자연이 만드는 아름다운 단풍의 색이 눈을 채운다. 과일과 곡식에겐 햇-이라는 칭호가 붙고, 그에 따라 가치가 오른다. 요 햇 녀석들은 맛과 냄새를 더욱 풍성하게 채운다.


생각하고 쓴 건 아닌지만 오감 중 네 개를 채웠다. 이렇게 되면 귀를 빼먹으면 안 되겠지. 가을이 왔음을 느끼는 순간이 오면 만끽하기 위한 노래들을 듣는다. 털갈이하는 동물처럼 나만이 갖는 일종의 의식이랄까. 9월엔 버스커버스커의 <처음엔 사랑이란 게>를, 10월에는 10cm의 <10월의 날씨>라는 노래를 듣는다. <처음엔 사랑이란 게> 노래가 담긴 버스커버스커의 앨범 재킷엔 밴드 일러스트와 단풍이 그려져 있다. 파격적이었던 <벚꽃엔딩>의 전략이 가을에도 보인다. 적어도 나에겐 통했다. <10월의 날씨>는 말할 것도 없다.


가을은 나를 충족시켜주는 계절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가 소개한 노래들은 충족과는 거리가 멀다. 가사들은 결여에 가깝고, 그래서 멜로디는 한층 쓸쓸하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다. 가을은 쓸쓸함도 제법 어울리는 계절이니까. 가을엔 낙엽이 있으므로.


내가 본 가을은 특별한 계절이다. 한쪽엔 수확한 곡식들이 쌓여가지만, 지력(地力)을 다한 밭의 허무한 민낯들이 드러난다. 나뭇잎들은 불꽃같은 색을 획득하지만, 마찬가지로 불꽃같이 짧은 시간이 지나면 생명력을 다하고 떨어진다.


그러면서도 뭐 하나 끝난 것 없는 계절이다. 밭도, 나무도 겨울 동안 생명력을 다시 회복할 것이고, 우리는 봄이면 새로운 것들을 늘 그렇듯 익숙하게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을을 시작과 끝이 아니라 시작과 또 다른 시작을 이어주는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저녁 6시가 되면 내 방에 달려있는 창 크기만큼의 노을을 볼 수 있다. (노을 상영 시간은 앞으로 점점 빨라질 것이다). 창 밖의 광경을 바라보다가 '노을의 색도 주황빛이네. 가을 하면 떠오르는 색도 마찬가지잖아. 가을은 시작들을 이어준다고 했고, 노을은.. 낮과 밤으로 하루를 이어주잖아. 그렇다면 주황은 이어짐의 색인가.'라는 발견에 이르렀고 스스로에 와! 하고 감탄했다. 엄청난 발견이야! 흥분해서 친구에게 말했지만 '노을은 분홍색이지'라는 답변을 듣고 김이 샜다. 아, 검증 없는 관찰은 모두를 설득할 순 없구나. 그렇지만 내 쪽도 과학자가 아니기는 하니까 괜찮다. 그냥 스스로의 감상에 취하면 된다.


주황색이 전보다 꽤 특별하게 느껴진다. 주황색 양말을 하나 사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하루가 다르게 가을에 가까워진다. 어쩌면 이미 가을이 됐을 수도. 어쨌든 이런 날씨에, 이런 글을 쓴다. 새로이 시작하는 글을.


다 익은 벼처럼 고개 숙인 과거들을 베어버렸다. 지력이 다한 의자에 홀로 앉는다. 다음 농사를 위해 씨앗을 뿌리듯, 나는 생명력 가득한 지면에 성실하게 글자들을 뿌린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보자. 올 가을엔 더 뚜렷한 주황빛 생각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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