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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즈맨 Sep 04. 2020

보리굴비를 먹으면서

티끌모아 에세이

인후통의 증세처럼 목이 따끔따끔하길래 가슴이 뜨끔했다. 예전 같으면 '자면서 먼지를 좀 먹었나 보네~'하면서 넘어갔을 테지만 감염과 거리두기의 시대에선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치과 의사들이 진찰하듯 핸드폰의 불빛으로 입 안을 확인해보니, 깊숙한 목젖 바로 위 생소한 위치에 구내염이 보인다. 잇몸에 생기는 그 동그랗고 하얀 것. 달에 있어야 될 크레이터가 내 목에 있었다.


나는 칫솔질을 급하게 하다가 잇몸에 부딪친다거나,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기면 그 날짜로부터 얼마 안가 높은 확률로 '그것들'이 생긴다. 이 작은 구덩이들과는 만남의 장소인 잇몸에서 자주 보는 사이가 되어 생성과 치료의 과정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었다 (그러나 매번 나에게 아픔을 선사한다). 빈번했던 나와의 관계를 더 깊게 가져가고 싶었는지 이번에는 꽤 새로우면서도 깊숙한 곳에 생겼다. 목젖 위라는 위치 선정이 생소한만큼 조심스러워져서 하루에 1회 섭취를 권장하는 구내염 약을 복용하고 하루 경과를 지켜볼까 하다가, 본래 가진 위험성보다 더 큰 경각심을 나에게 주고 있다는 점이 괘씸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괘씸죄는 가중 처벌이다. 알보칠을 꺼내 든다. 면봉에 약을 묻혀 몇 번 지져주니 금세 상처는 하얀색으로 변해 새살이 차오르는 느낌을 준다. 그 느낌이 목젖과 닿아 있으니 꽤나 거북하다. 손가락을 목젖에 대고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불편함을 안고도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섭취했다. 배고픔으로부터 벗어나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배고픔의 정반대의 영역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 세계의 거울 속 남자는 꽤 보기 싫었다. 그게 어느새 4달 전이다. 거울 속 나를 잃기 위해 나는 매일같이 동네를 뛰었다. 약속이 있는 날엔 못 뛰기도 했고, 평소보다 피곤한 날엔 안 뛰기도 했으므로, 매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한 달에 28회 이상은 뛰었다. 스스로 설정한 불성실의 기준인 최대 3번은 넘지 않았다. 삼세번이라는 말도 있듯이 내 반올림을 허용해주시라.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로 운동을 시작한 뒤 무언가를 섭취하는 행위의 의미가 전보다 커졌다는 것을 밝히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 푸시업 후 러닝. 작은 루틴이다. 아침의 보람을 위해 폭식은 점점 자제하게 된다. 그리고 하루에 먹는 행위를 12시에 먹는 점심, 6시에 먹는 저녁. 총 2회로 조절한다. 이렇게 제한된 식사 속에서 한 끼 한 끼의 메뉴 조합은 내게 있어서 중요해졌다. 면과 밥, 맵고 느끼함, 집밥과 패스트푸드 등. 여러 카테고리들을 다양하게 섞는 하루가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아이스크림보다 좋다. 그것은 내가 아이스크림을 별로 안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면을 가장 좋아하지만 점심 저녁으로 연달아 국수를 먹은 날이면 속이 허해서 꼭 6시 이후에도 뭔가를 먹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막대한 허기를 느끼며 잠에 든다. 그 상태로 아침에 일어나 공복으로 러닝을 시작하면 몸에 힘이 없다. 분명 밥을 먹은 어제와 같은 거리를 뛰었는데도 더 힘이 든다. 피로가 쌓여서 그렇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일정한 거리를 위한 일정한 섭취가 있어줘야 한다는 사실. 나는 면을 좋아하지만 밀가루에 쏠린 식사는 나를 힘 빠지게 만든다. 그렇다고 면을 포기하고 밥으로만 채운 식사를 할 순 없다. 근본적으로 면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 '맛을 느끼게 한다'는 음식의 원래 목적을 성취한 것들은 대부분 면요리다. 영양적 관점으로나 인간적 경험으로나 음식의 균형과 조화는 덕분에 다양해지는 내 삶에 풍성함까지 가져다준다. 그것들은 나에 의해 몸속으로 받아들여지고, 건강한 생각과 행동의 재료들이 된다.




어제는 균형의 추를 맞추기 위하여 점심은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를 먹었고, 저녁은 밥과 보리 굴비를 먹었다. 보리 굴비란 생선 '조기'를 바닷바람에 자연 건조한 뒤 보리와 함께 숙성시킨 굴비이다. 보리에 굴비를 넣어 보관하기에 저렇게 고급지고 먹음직스러운 이름을 갖게 됐다. 우리 가족이 보리굴비를 즐기는 방법은 우려낸 녹차물에 얼음을 동동 띄워 차갑게 만든 뒤, 밥을 말아서 잘 풀어준 뒤에, 밥과 녹차를 뜬 한 숟가락에 굴비의 살 한 점을 올려 함께 먹는다. 마.. 맛있다! 굴비의 짜고 비린 맛을 녹차물이 중화시켜준다. 녹차물에 미리 말아두어 부드러운 밥은 씹을수록 달고 고소하다. 그러다가 나는 '이 귀중한 저녁 식사에서 생선만을 음미하고 있는가?'라는 생각에 잠깐 지루해지면 푹 익어 시원한 열무김치로 해소한 뒤, 다시 굴비로 젓가락을 가져간다.


앞서 쓴 보리굴비 이름의 유래에서 볼 수 있듯이, 보리굴비를 만드는 건 꽤 번거롭고 시간이 드는 작업이기 때문에 몸값이 꽤 비싸게 나가는 식재료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집 식탁에서도 녀석은 가장 큰 접시에 올려져 센터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한 위치 선정은 '내가 메인이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보리굴비는 결국 조기라는 생선이다. 그러나 '조기'와 '보리굴비'를 검색해 보시라. 언뜻 봐도 확실하게 가격 차이가 있다. 9월 4일 오전 11시 검색 시, <10 미, 중 사이즈>라는 조건에서 조기는 1만 원 대로 구매할 수 있지만 보리굴비는 같은 조건이라면 7만 원대가 최저가다. 심지어 조기는 내가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특 A급으로 광고하는 것으로 찾았다. 같은 조기로 태어나도,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에 따라 이처럼 시장에서의 가치가 달라진다. (결국 사람 뱃속으로 들어가는 비극적 운명이기에 큰 의미는 없을 수도 있지만)




조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 흡수하는 것. 숙성하는 것들에 의해 맛이 변하고, 가치가 변한다. 바로 여기서 나는 최근에 냉전이었다가 가까스로 봄이 찾아온 온 부모님과 나의 일에 대해 쓰고 싶다. 나는 대학을 진학하며 부모님 곁을 떠난 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자취 생활을 이어왔다. 입시로부터의 해방감과 청춘이라는 최고의 휘장이자 최후의 핑계를 얻은 나는 거침없이 살았다. 기준 없이 선 없이, 술, 연애, 우정 등 내가 겪었던 사회의 모든 면에서 감정의 과잉으로 지나치게 치우쳤었다. 과거에 대한 내용을 담아 연재 중인 <직선의 태도들>에서도 이후에 다루겠지만, 군대를 다녀오면서 머리가 조금 큰 나는 스스로에게 기준선을 그어갔다. 그리고 내가 지키기 위해 그었던 선들은 점차 타인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치우친 선이 되어 버렸고, 그 순간 그 선은 나를 지탱하는 '기준'의 가치를 잃고 말았다.


'옳고 그름'의 흑백논리는 회사를 다니면서 더 심오해졌고, 그러면서 내가 내뱉는 말과 하는 행동의 모순도 심해졌다. 날 둘러싸고 있는 것, 흡수한 것, 내가 숙성시키는 것은 갈등과 혼란뿐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도 모르게 됐을 때가 그쯤이었다. 그래서 회사를 나와 대전에 내려와서 여유를 찾으며 살고자 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회복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논리들은 이미 나를 이루고 있었고, 얼마 전까지도 나는 사촌 형을 마음속의 심판대에 세웠다. 그러고 <추방>이라는 심판을 내리기 직전에 - 어머니와 했던 대화에서 나는 그간 잊고 살았던, 한때 내가 가장 우선으로 삼았던 것을 다시 찾게 됐다. 그건 지금 내가 가진 옳고 그름과는 가장 먼 개념 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그보단 행동과 생각의 무조건적인 이유로 존재할 뿐이다.


'상대방만을 사랑하는 것도 사랑이지만, 상대방 주변의 것들까지 사랑하는 것이 더 멋진 사랑'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나의 흑백 세상 속에 컬러로 등장했다. 색이 있다는 것은 형체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나는 아버지만을 사랑해서 아버지의 형제의 아들. 사촌 형을 미워할 수 있지만(이래도 문제 될 건 없을 수 있지만),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나는 아버지가 붙들고 있는 것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딸린 조건은 없다, 이유도 없다. 글로 써봐도 확실히 이게 더 멋져 보인다. 모순된 정의감으로 일일이 조건들을 나누고 분리하다 보면 마음은 가난해진다. 다양하고 풍요로운 것들을 조화롭게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편이 좋다. 치우친 흑백논리는 결국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는 횡단보도가 돼버리고 만다.




보리굴비를 먹으며, 어머니의 사랑 표현법인 나를 위해 만든 다채로운 '집밥'을 통해 사랑을 흡수한다. 내가 하겠다는데도 굳이 굴비의 살을 발라주시는 어머니. 그리고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굳은 확신으로 기다려주시는 아버지. 이 순간 나를 둘러싸고 있는 건 분명 사랑이다. 하루하루 나만의 사랑법을, 또 나를 숙성해간다. 그렇게 나는 나의 쓸모를 정해 간다.


차갑게 만든 녹차에 밥을 말아 짭조름한 굴비의 살을 올린다. 그동안 차갑기만 했던 머리에 짠한 감정들이 들어오는 순간. 울컥하는 것들이 목에 걸린다. 목젖 바로 위의 구내염 때문은 아닐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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