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
며칠 전, 네가 드디어 ‘뒤집기’에 성공했어.
작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끙끙대던 네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한 바퀴 뒤집은 그 순간, 아빠는 마치 세상을 처음 발견한 탐험가처럼 기뻤어. 엄마와 함께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기까지 했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너의 모습을 보며 아빠는 여태 경험하지 못한 행복감을 느꼈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는 없을까?’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었어.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 가족은 함께 차를 타고 할머니 댁에 가던 중이었어.
차에 연결한 음악 앱에서 우연히 영화 맘마미아(Mamma Mia) OST가 흘러나왔단다. 엄마와 아빠가 금세기 최고의 뮤지컬 영화로 꼽는 명작이야. 둘의 연애시절에 종종 함께 보던 특별한 작품이기도 해.
노래를 매개로 대화는 자연스레 영화로 이어졌고, 아빠는 엄마에게 이렇게 얘기했어.
“우리 가족이 매년 연말에 연례행사로 꼭 같이 봐야 할 영화가 있다면 단연코 맘마미아야.”
엄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어.
며칠 뒤, 아빠 혼자 운전하던 길에 다시 맘마미아 영화의 사운드 트랙들이 흘러나왔어.
그중에서도 Slipping Through My Fingers라는 곡이 아빠의 마음에 콕 박혔단다.
이 노래는 맘마미아 주인공인 도나가 자신의 딸 소피가 성장하면서 점점 멀어져 가는 듯한 느낌과, 그 시간을 붙잡지 못하는 아쉬움을 표현한 노래야.
“Slipping through my fingers all the time”
– 언제나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네
“Sometimes I wish that I could freeze the picture”
– 때로는 이 장면을 그대로 얼려버리고 싶어
이 가사를 곱씹으며 너와 함께하는 이 시간들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지 새삼 느꼈어.
정말이지,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느껴졌단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가슴이 뭉클해져 눈물이 날 뻔했어. 하지만… 결국 참았지.
왜냐하면, 아빠는 원래 감정을 표현하는게 서툰 사람이거든.
사회생활을 남들보다 일찍 하며 감정은 비효율이라 여겼고, 감정을 드러내는 건 어딘가 약해 보인다고 믿어왔어.
그냥 감정을 꾹 참는 것이 아빠가 생각하는 ‘어른스러움’의 방식이었고, 오래 동안 입고있던 ‘감정의 갑옷’이었단다.
하지만 그날 밤, 아빠는 용기를 내어 엄마에게 운전하며 느낀 점을 조심스럽게 털어놨어.
“오늘 운전하다 맘마미아 OST Slipping Through My Fingers가 나왔는데, 듣다보니 눈물이 날뻔했어.”
어린 자녀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님의 마음을 알것같다는 얘길 덧붙였어.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노래를 틀었어. 이후 짧은 3분 동안, 엄마의 눈가도 촉촉해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같은 감정을 조용히 공유했어. 그리고 그 순간, 말보다 더 깊은 연결이 엄마와 아빠 사이에 생겨나는 걸 느꼈단다.
아빠가 최근 읽은 “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의 내용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어. 이 책에서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제프 폴저 교수는 ‘취약성 고리(Vulnerability Loop)’ 라는 개념을 언급해.
한 사람이 먼저 용기를 내어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신호를 보내면, 상대방이 그 신호를 안전하게 받아주고, 다시 자신의 취약함으로 화답하며 신뢰가 단단한 고리처럼 연결된다는 이론이야.
“취약함을 드러내는 건 약점이 아니라 신호다. 누군가 그 신호를 받아줄 때, 진짜 신뢰가 시작된다.”
그날 밤, 아빠가 먼저 '눈물이 날 뻔했다'고 용기를 내 신호를 보냈을 때, 엄마가 말없이 공감해주며 그 신호를 온전히 받아준 덕분에, 우리의 ‘취약성 고리’는 한 뼘 더 단단해졌던 거지.
취약성이 신뢰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가 된다는 걸 몸소 체험한 순간이었어.
아들,
아빠는 네가 강한 아이로 자라길 바란단다.
하지만 그 강함이란, 감정을 꾹 참고 견디거나 취약성을 감추는 게 아니라 이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용기야.
기쁘면 마음껏 웃고, 슬프면 울어도 괜찮아. 걱정되면 누군가에게 말해도 괜찮아.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건 약해서가 아니라, 취약성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아빠도 아직 이런걸 배우는 중이야. 그리고 너와 엄마 덕분에 조금씩 스스로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느껴.
오늘 네가 온몸으로 바닥을 밀어내며 세상을 뒤집는 데 성공했듯, 아빠도 너와 엄마 덕분에 수십 년 묵은 낡은 감정의 갑옷을 벗고, 닫혀 있던 마음의 세상을 한번 뒤집어낸 것 같아.
그래서 아빠는 이제 분명히 알아. 노래 가사처럼 시간은 붙잡을 수 없지만, 이렇게 서로의 마음에 닿기 위해 용기를 내고 함께 성장하는 순간만큼은 영원히 우리 안에 남는다는 걸.
그리고 이 깨달음이야말로, 아빠가 너에게 물려주고 싶은 가장 중요한 유산이란다.
너와 함께 세상을 뒤집는 법을 배워가는 아빠가.
2025년 6월 9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