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위한 일이, 나를 위한 일로
요 며칠 장마로 비가 오더니, 오늘은 밖이 펄펄 끓는 가마솥 같았어. 낮에 사방사방 공원으로 산책도 나가봤는데, 이제는 너무 더워서 그마저도 쉽지 않네.
지금 너는 에어컨 바람 속에서 시원하게 뒤집기와 되집기를 하며 놀고 있어. 요즘은 애착이라는 개념이 생긴 건지, 아빠가 너한테 강매(?)했던 공룡 인형과 공룡 담요를 꼭 붙잡고 자는 게 귀여워.
아빠가 매달 쓰는 편지가 늘듯, 너도 부쩍 컸어. 뒤집기 하며 꼼지락대는 네 모습을 보면, 아빠는 가끔 네 마음속이 어떤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져. 그런 마음이 생길때면, 아빠는 조금씩 글을 쓰곤 해.
아빠는 요즘 글을 쓰면서 참 많은 것을 느껴. 처음엔 그저 일상을 기록하고 너에게 아빠의 생각들을 전해주려는 마음이었는데, 쓰면 쓸수록 글쓰기가 나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치 흐릿했던 풍경이 글이라는 렌즈를 통해 또렷해지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요즘 세상은 글쓰기가 참 쉬워졌어. AI가 뚝딱하면 근사한 글을 써주는 시대잖아. 아빠도 글쓸 때 다양한 AI 도구를 써봤는데, 정말 놀랍도록 매끄럽고 완벽한 문장들을 만들어 주더라.
그런데 말이야, 이상하게도 그 글을 읽으면서는 ‘완벽하지만, 나답지 않은 글.’ 같은 느낌이 들었어.
왜 그럴까 생각하다가, 최근 읽었던 책의 한 문장이 떠올랐어.
“우리가 인간의 자질로 찬미하는 것 가운데 상당수는 재앙이나 고통이나 어려움에 맞서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장강명, 먼저 온 미래
아, 어쩌면 이 글쓰기라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쉬운 길을 택하는 대신, 한 문장을 위해 밤새 고민하고, 수없이 고쳐 쓰고, 때로는 막막함에 한숨 쉬는 그 과정. 그 느리고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 진짜 ‘나’가 담기는 게 아닐까?
아빠는 그래서 앞으로도 느리고 어설픈 글쓰기를 계속할 거야.
AI가 아무리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낸다 해도, 내 손으로 써 내려간 글만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오롯이 담을 수 있다고 믿으니까.
물론 AI는 멋진 도구야. 아빠도 생각을 정리하거나 문장을 다듬을 때 AI의 도움을 받기도 해. 잘 활용하면 아주 훌륭한 글쓰기 파트너가 된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글쓰기의 출발점은 언제나 내 마음이라는 거야.
생각의 시작, 문장의 방향, 문장 뒤에 담긴 감정들. 그건 오직 내가 겪고, 느낀 것만이 만들어낼 수 있지.
아빠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아빠는 사는 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아. 매일의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
그래서 글을 쓴다는 건 연기처럼 흩어지는 생각을 붙잡아 단단한 실체로 만드는 일이야. 내 안의 목소리를 듣고, 나만의 가치를 붙잡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글을 쓰면서 아빠는 이런 것들을 배웠단다.
생각이 정리돼.
머릿속에 엉켜 있던 것들이 글로 나오면서 선명해지고, 그 선명함이 결국 아빠의 가치관이 되고 삶의 방향이 되더라.
마음의 근육이 단단해져.
힘들고 예상치 못한 일들을 글로 풀어내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겨나.
순간을 붙잡을 수 있어.
너와의 찰나 같은 소중한 순간들, 글로 남겨두면 오랜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되살아나.
좋은 연결을 만든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잘 봤어요”라고 말해주면, 아빠의 진심이 또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았다는 게 느껴지고 그게 다시 아빠를 한 발짝 더 나아가게 만들어 줘.
글을 쓴다는 건 그저 문장을 만드는 게 아니야. 삶을 정리하고, 나를 정의하고,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만들어가는 일이야.
그리고 그건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지.
아빠가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을 땐, 분명 너를 위한 일이었어.
너에게 삶의 조각들을 남겨주고 싶은 마음, 언젠가 네가 읽게 될 아빠의 마음을 기록하고 싶었거든.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문득 깨달았어. 너를 생각하며 쓴 이 글들이, 결국 나 자신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었더라고.
쓰면 쓸수록, 그 글이 아빠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너를 위한 일이, 나를 위한 일이 되었다고.
사랑하는 아들,
언젠가 너도 너만의 이야기를 세상에 꺼내놓고 싶을 때가 올 거야. 그때는 꼭 기억해. 잘 쓰지 않아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돼.
그저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게 써 내려가렴. 서툰 문장 속에도 너의 진심과 삶의 흔적이 담겨 있다면 그건 이미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글이란다.
혹시 글이 막히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괜찮아. 그때는 언제든 아빠에게 물어봐.
아빠도 글을 쓰며 수없이 길을 잃었고, 또 그 길을 찾아가며 살아왔으니까.
너의 글을 세상에서 가장 먼저 읽게 될 행복한 독자가 이곳에 있다는 걸 꼭 기억하렴.
사랑하는 아빠가,
2025년 7월 21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