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니?
얼마나 아프게, 혼자 반짝였니?
또각또각,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구두 소리가 바닥에 얕게 퍼진 곰팡내를 모양 찍기 틀처럼 콕콕 찍어내는 듯했다. 노후한 건물의 내부는 외관만큼이나 초봄인 바깥 날씨와는 사뭇 다르게 을씨년스러웠다.
‘살면서 내가 이런 곳을 찾아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한 계단 한 계단 발을 옮기는 사라의 표정은 두려움이 묻어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것 같은 단호한 의지로 상기돼 있었다. 층마다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는 비상구 표시등은 금이 가 있거나 깨진 채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소망……, 직업……, 소, 개, 소.’
3층 복도 끝,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출입문에 붙어있는 글자를 눈으로 짚어가며 이제 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나직이 소리 내어 읽었다. 출입문 손잡이를 잡은 사라는 손이 달라붙은 사람처럼 한참을 서 있었다.
‘미친 사람 취급하면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는 사이에 ‘잘 가, 잘 있어’ 수만 번의 인사로 헐거워진 문이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스르르 열렸다. 서류들이 널브러진 책상과 금이 간 사금파리처럼 낡아 보이는 인조 가죽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삭막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반갑게 손님을 반기는 반백의 남자가 온화한 표정과 함께 코에 걸친 돋보기 너머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걸음이 무거웠던 사라는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어떤 요구 조건을 말해도 최소한 화를 내거나 욕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겼다. 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라에게 남자가 물었다.
“일자리가 필요한가요? 아니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여기 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너무 많은 눈물을 쏟았다. 사라는 기도하듯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말했다.
“사람이 필요해요, 사람이……, 물과 약간의 햇빛만으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다가……, 흙이 되어도 좋을 사람이요!”
사라의 말은 크레셴도처럼 처음에는 들릴 듯 말 듯 시작되더니 점점 갈수록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남자는 앉은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한참 동안 사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역시, 내가 틀린 건가? 누군가는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거로 생각한 게…….’
조금 전 용감하다 못해 무모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라는 이 어색한 적막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을 정도로 민망했다.
“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녹차는 어때요?”
남자는 이내 평정심을 찾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에게 소파를 가리켰고 탁자 위 신문과 잡지를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종이컵에 티백을 넣은 후 끓는 물을 부어서 탁자에 놓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임에도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불편하고 어색하기보다는 암묵적인 지지와 이해가 공존하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남자가 뜨거운 녹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두 손을 여전히 맞잡은 채 떨고 있는 사라를 바라보다가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 별의별 일이 다 있으니 놀랄 일도 아니죠. 얼마 전에 한 노인이 와서는 아끼던 반려견이 죽었는데 그 개와 똑 닮은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상심이 컸나 봐요. 개는 쉽게 병들고 수명도 짧으니……, 그 개가 프렌치 불독이었거든요.”
“아니, 키우던 개를 닮은 사람을 구해 달라고 했다고요?”
사라는 자신의 처지는 잊은 채 깜짝 놀라며 남자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사람을 구해주셨나요? 지원자가 있긴 했나요?”
사라는 흥분한 목소리로 연거푸 질문들을 쏟아부었다.
“말도 마요, 서로 하겠다고 난리였어요. 아니, 먹여주고 재워주고 돈까지 준다는데 누가 마다해요. 그것도 요즘 같은 불경기에, 내가 잘 아는 놈이 있었는데 생긴 게 불독 저리 가라였어요. 나한테 넙죽 절하고 갔어요. 얼마나 좋아하던지……. 며칠 전에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할머니랑 같이 산책 중이더라고요. 살이 많이 쪄서 개집도 큰 거로 다시 주문했다고 하대요. 하하하, 그 개가, 아니 그놈이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말하는데 얼마나 우습던지 같이 한참을 웃었어요.”
신나게 말을 잇던 남자는 갑자기 어두워지는 사라의 얼굴에 머쓱해져서는 식은 녹차를 들이켰다. 그리고 펜을 집어 들더니 진지한 얼굴로 탁자에 놓인 구인서류의 빈칸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음……, 물과 약간의 햇빛이라, 흙이 되어도 좋을 사람…….”
글자를 끄적이다가 생각에 잠기기를 반복하던 남자가 물었다.
“사람이 몇이나 필요하신가요?”
“둘이요, 외롭지 않게, 남자와 여자면 더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