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사라

by 나무

별일과 별 일은 어떻게 다르지?

그건 눈물이 고이는 것 같은 사적인 일이야.





“남자와 여자라…….”


남자는 특별한 단어라도 되는 것처럼 구인서류 위에 ‘남자와 여자’라 쓰고 글자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손가락으로 볼펜을 좌로 한 바퀴 돌렸다가 우로 뱅그르르 쉬지 않고 돌렸다.


‘저렇게 돌리려면 얼마나 연습해야 하지? 뭔가 의문이 생기거나 생각을 정리할 때 도움이 될 것도 같아.’


남자의 손가락 사이에서 현란하게 돌아가던 볼펜이 멈추었다.


“그리고 또요?”


“최저시급보다 더 줄 수 있어요, 대신 집에서 같이 지내는 동안에는 찾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핸드폰도 꺼놓고, 고용주의 사생활에는 관심 두지 않고 어떤 질문도 하지 않아야 하고…….”

사라는 미리 준비한 요구 조건들을 또박또박 말하면서 ‘고용주’에 더 힘을 주었다. 자신부터 이것은 고용주와 고용인으로 이루어진 합법적이며 평범한 계약이 될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남자는 열심히 적어 내려갔다.

“세상 경험이 많고 강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어떤 환경에서든 잘 적응한다면 더 좋고요.”

“그러면 약속한 일당 외에 숙식도 다 제공하는 거죠?”

남자의 물음에 사라는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숙식이라는 게……, 말이 숙식이지……,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물과 약간의 햇빛으로 지내다가……, 잘 지내면 좋겠지만, 혹시, 그러니까…….”

사라는 본론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남자의 손에서 돌아가는 볼펜처럼 뱅뱅 말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집에서 키우는 화초처럼요. 시들 수도 있고 썩거나 말라버릴 수도 있고, 또 화초들은 뿌리를 담글 적당한 양의 흙이 있는 곳이면 그게 곧 집이자 방이 되는 거잖아요, 그게 숙식 제공이라 할 수도 있고요.”

사라는 머릿속으로 수백 번 되뇌었을 생각들을 처음 입 밖으로 뱉으면서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는 급기야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말을 하면서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얼마나 황당한 일을 자기가 벌이고 있는지 더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어요! 정성을 다해서 보살필 거예요! 절대 죽지 않게, 아니, 시들지 않게…….”

사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죽지 않게, 시들지 않게 ……."

남자는 사라가 한 말을 다시 읊조리며 뒷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자, 자, 알겠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하는 일이 필요한 인력을 제공하는 일이니 뭐 일할 사람이 좋다고만 하면 다른 것들이야 문제 될 게 없지요. 사람 구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네요.”

눈에 눈물을 머금고 있는 사라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사라의 예상과는 다르게 편안해 보였다.

사무실을 나와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사라는 무거운 짐을 그곳에 부려놓고 온 듯 홀가분했다. 가로수는 연둣빛 어린잎들을 밀어내느라 소리 없이 분주했고 따뜻한 햇살이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봉오리들의 꽃잎을 벌리려 애쓰는 중이었다.

‘그래, 뭐든 심기 좋은 계절이야.’

사라의 발걸음은 가벼워졌고 집으로 바로 가기에는 축복 같은 봄날이 아쉬워서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봄 햇볕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산책 중이거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두 정답고 행복해 보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공원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하얀 민낯이 낯설었다. 무심히 자기 얼굴을 흘낏 쳐다보는 눈빛에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사라는 얼굴을 붉혔다.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해 역방향으로 걸어가면서 평범한 삶이 허락되지 않는 자기 삶이 운명 같다고 생각했다.

사라는 인적이 뜸한 곳에 오랫동안 허공을 떠안고 있느라 다리가 휘어진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사라는 저만치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다시 자책에 빠져들었다.

‘직업소개소가 아닌 신경정신과에 가서 상담받아야 할 일이었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지? 대체 난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거야?’

사라는 계속 자문하며 봄기운이 만연한 공원에서 혼자 겨울인 듯 카디건의 앞섶을 단단히 여미고 생각에 잠기다 전화기를 들었다. 고민중이 생각났다. 형제가 없는 사라에게 민중은 서로에 관해서는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가까우면서 자매처럼 의지하고 지내는 오래된 친구였다.


“오! 웬일이야, 이 시간에 작가님이 이 누추한 사람에게 전화를 다하고?”


고민중답게 씩씩하고 살가운 소리가 들렸다


“뭐 해? 바쁜 시간 아니야?”


“괜찮아, 아이들 다 하원하고 교실 청소 중이었어. 날씨가 따뜻해져서 요즘 바깥놀이를 길게 하는데 말도 마, 나도 이제 늙었나 봐, 애들 잡으러 다니느라 벌써 다리가 풀렸어. 우리 반에 로하라는 아이가 있는데 뭐든 혀로 맛을 보거든. 오늘은 작고 동그란 돌을 주워서 혀를 대보고는 입맛을 다시는 거야.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주의시켰거든. 근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도 따라 해 보고 싶다, 그런 생각. 그래서 작은 돌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어왔어. 집에 가서 맛이 어떤지 한 번 나도 해보려고, 크크 웃기지? 매일 아이들에게 ‘하지 마라’ 소리를 내가 입에 달고 산다. 하루라도 ‘하지 마라’ 말고 ‘그래, 해보자’ 소리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사라는 민정의 속사포 같은 말을 들으니 박하향이라도 맡은 것처럼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민정이가 주머니에서 꺼낸 돌에 혀를 대는 상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전화는 네가 했는데 말은 내가 혼자 다 한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냐,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항상 그렇잖아, 너 때문에 내가 웃어.”


“같이 저녁 먹을래? 애도 씨하고 내 남친, 지방 출장 중인데 우리도 간만에 같이 바람 좀 쐬자고.”


“그건 담에 하자, 오늘은 좀 일이 있어.”


“그래, 그런데 정말 애도 씨랑 다시 합치는 거 맞아? 결정한 거야?”


“응, 전보다 서로 편안해졌어. 시간도 많이 흘렀고…….”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린 사라의 눈에 희한한 장면이 포착됐다.


‘저건 뭐지?’


저쪽에서 거대하고 육중한 무언가가 네 발로 달리다가 무엇이 급했는지 벌떡 일어서서는 다시 두 발로 구부정한 허리를 다 펴지도 못한 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민중아, 내가 다시 전화할 게.”


서둘러 전화를 끊은 사라는 눈을 크게 뜨고 저 희한하게 생긴 것에서 계속 눈을 떼지 못했다. 손잡이 부분에서 끊어져 버린 목줄을 질질 끌며 달려오는 그것은 움직이는 모양새로 보면 처음에는 분명 개였는데 지금은 무엇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점점 사라의 눈앞에 가까워질수록 그것은, 영락없는 사람이었다. 말이 달려오는 거지, 몸이고 얼굴이고 살이 덕지덕지 붙어서 엉거주춤 쓰러질 듯, 무거운 몸을 어떻게 지탱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로 둔해 보였다. 그 개는, 아니, 사람은, 아니, 개는, 사라를 지나쳐서 무언가에 쫓기듯 입에 침을 머금고 계속 달렸다.

‘아! 저 개가 바로 그…….’

사라는 직업소개소에서 들은 프렌치 불독을 닮은 사람 얘기를 떠올렸다.

“호태야! 호태야!”

한 노파가 지팡이를 쳐든 채 소리 지르며 개를 쫓아가고 있었다.

“아이고 이놈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지극정성을 다해 돌봐줬더니, 도망을 가! 이 배은망덕한 놈!”

노파의 주름진 얼굴은 분노가 더해져 더 일그러져 있었고 친자식에게 버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넋이 나가 보였다.

‘세상에, 저게 무슨 일이야!’

사라는 개와 노파가 사라진 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 사람처럼 나도 제정신이 아닌 건가? 저 모습이 앞으로의 내 모습이 아닐까?’

개와 노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공원에 있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거나 혀를 차며 수군댔다.

봄이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벚꽃처럼 휘날렸고,

사라는 울고 있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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