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는 눈도
날리는 이팝꽃도
내게는 퍼진 밥알 같았다
오늘도 줄이 길었다. 제때 밥을 먹으려면 일찌감치 나서면 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배식 전에 드리는 예배가 문제였다. 그늘막 아래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찬송가를 부를 때는 입만 달싹거리면 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할 때는 눈 질끈 감고 있으면 되는데 그 일이 왜 그렇게 밥 굶는 것보다 싫은지 모르겠다. 그래서 정숙은 오늘도 천천히 역으로 향했다. 집에서 역까지는 꽤 거리가 있지만 그렇게 걷는 일이라도 해야 하루가 빨리 갔다. 몸뚱이를 밑천으로 먹고는 살았지만 모은 돈은 없었다. 순진한 놈, 못된 놈, 드센 놈, 사기꾼까지 별별 남자들을 다 거쳤다. 가끔은 나도 남들처럼 살 수 있겠구나 하면서 평범한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병든 몸과 밀린 월세로 보증금조차 말라가는 쪽방뿐이었다.
지역 교회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역광장에서 무료 급식을 실시하는데 오늘은 좀 상황이 달랐다. 멀끔하게 흰 와이셔츠를 입고 눈에 띄는 원색 잠바를 걸친 남자들 몇몇이 어깨에 띠를 두른 채 국자를 들고 배식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밥 한 끼를 위해 사방에서 모인 사람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맨 끝에서 기웃기웃하던 정숙은 중간쯤에 서 있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야! 노숙자!
정숙은 숙자를 향해 양손을 펼쳐 들고 달려갔다.
“이게 누구야? 방정?”
“그래, 나야 나, 방정숙!”
“이게 얼마 만이야, 요즘 어디서 지내?”
“나, 지금은 S호텔, 거기가 주말 조식이 잘 나와.”
숙자의 말에 정숙의 눈이 커졌다.
“호텔? 진짜?”
숙자는 정숙의 놀라는 얼굴이 보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서울 스테이션.”
둘은 서로의 어깨를 밀고 가슴을 두드려가며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졌다. 웃음을 겨우 멈춘 후 숙자는 정숙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자기 영 얼굴이 망가졌네, 뭔 일 있어?”
“뭔 일이 뭐가 있어? 내일 당장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 우리 신세가 뭔 일이지.”
정숙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계면쩍은 듯 웃었다.
“그 복덕방 영감하고는 쫑난거야?”
정숙은 숙자의 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앞뒤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아, 그 한 사장?”
정숙은 그래도 자기가 한때 만났던 남자를 복덕방 영감이라고 하대하는 숙자의 말이 거슬렸다.
“복덕방 아니고 공인중개사, 영감 아니고 한사장.”
“뭐 이리 뒤집든 저리 뒤집든 간에 힘도 못 쓰는 영감탱이 맞잖아.”
두 여자는 다시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정숙이 목소리를 낮추고 숙자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말도 마, 그 마누라한테 걸려서 내 머리 다 쥐어뜯기고, 그 사람이 얻어준 알량한 원룸에서도 쫓겨나 이 신세잖아. 그래도 맘은 지금이 그때보다 편해. 나란 년은 남의 돈 공짜로 쓰면 탈 나는 사주랬거든.”
“쯧쯧, 우리 방정, 전성기도 다 지나갔구나.”
숙자가 정숙을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숙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피해 앞치마를 매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근데 저 사람들은 뭐래? 낯익은 얼굴들은 별로 없고 못 보던 사람들이야.”
“뭐긴 뭐야, 선거철 다가오니 한 표가 금표라 저기서 저러고 있잖아.”
기호 3번이라는 띠를 두른 남자가 웃으며 식판에 밥을 퍼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밥에…….” 숙자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말끔해 보이는 다른 남자가 반갑게 인사하며 식판에 나물 반찬을 담았다.
“그 나물…….” 정숙이 침을 삼키며 숙자의 말을 받았다.
“어디 내가 한 번 꼬셔 봐?”
“오, 방정! 살아있네!”
두 여자는 은근한 눈빛으로 배식에 여념이 없는 남자들을 보고 있었다. 그때 뒷줄에 서 있던 노재수가 정숙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어이, 거기 아줌마! 왜 은근슬쩍 새치기야? 진작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안 보여?”
정숙은 얼굴이 붉어지며 재수를 쏘아봤다.
“새치기는 누가 새치기를 했다고 그래? 나, 잠깐 화장실 다녀왔는데.”
“거짓말도 정도껏 해! 어디 자빠져 있다가 이제 나타나서 앞에 서 있냐고 뻔뻔하게!”
“근데 이 아저씨가 왜 반말이야. 재수 없게!”
정숙과 재수의 말싸움은 밥 냄새만큼이나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잘한다'. '그러다 정들겠어', '누가 이기나 더 해 봐' 등등의 추임새가 나오기 시작했다.
“잔말 말고 빨리 뒤로 가!”
재수는 지지 않고 정숙을 재촉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정숙을 야유하자 정숙은 어쩔 수 없이 뒷줄로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는 정숙을 재수가 쳐다보자 정숙은 그의 옆을 스쳐가며 턱을 내밀고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간다, 가! 간다고! 어디 그지 발싸개 같은 게 나를 지 동급으로 봐.”
그러자 재수가 정숙의 머리채를 잡았다.
“뭐 그지 발싸개?”
“이거 안 놔! 뒤로 가면 될 거 아냐!”
정숙이 재수의 멱살을 잡았다. 당황한 재수가 정숙의 머리에서 손을 떼자 정숙은 이때다 싶어 있는 힘을 다해 재수를 밀쳤다. 뒤로 밀려가며 엉덩방아를 찧은 재수는 벌떡 일어나 성나 소처럼 정숙을 향해 머리를 박았다. 정숙의 코에서 코피가 흘렀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구경꾼들이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급식소에서 배식하던 남자들과 봉사자들도 뛰어나왔다.
“아이고, 밥! 나물! 나 좀 살려줘요!”
정숙의 비명은 광장에 퍼진 밥 냄새를 눌렀고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비둘기들이 놀라서 퍼덕거리며 날갯짓을 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