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성실

by 나무

오늘과 동전은 닮아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은 금속처럼 생경했다

익숙한 사람의 뒷면도 가끔 헷갈렸다





금요일, 작업 종료를 알리는 음악 소리와 함께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다. 평생 멈출 것 같지 않는 가난도 이렇게 약속처럼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기저기서 신음과 함께 기지개를 켰다. 조립공들의 한주가 마감하는 이 시간은 모두 피곤에 찌들어 있으면서도 주말에 대한 기대로 목소리에 활기가 담겼다. 성실은 탈의실에서 작업복을 벗으며 한껏 들떠있는 보경의 콧노래를 기분 좋게 듣고 있었다.


“정말 안 갈 거야? 오랜만에 회식인데, 야아, 같이 가자.”


보경이 성실의 팔에 매달리며 응석을 부렸다.


“몸도 안 좋고, 나 술 못 마시는 거 언니도 알잖아.”


“그러고 보니 얼굴이 영 별로다. 병원에서는 뭐래? 고치기 힘든 거야?”


보경의 직설적인 화법에 이미 적응이 됐지만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하나 성실은 난처했다.


“너 벨트 돌아가는 데 중간에 자주 나간다고 주변에서 한 소리씩 해.”


“미안해, 언니, 앞으론 조심할 게.”

“나한테 미안할 게 뭐야. 너 걱정되니 하는 소리야. 요즘 물량도 예전 같지 않아. 인원 감축한다는 소리가 있어. 병원 간다고 조퇴도 잦고……. 저번에 쓰러져서 119에 실려 갔을 때도 이쪽 라인 사람들 말들이 많았어. 요양원 가야 할 사람이 왜 공장에…….”


보경이 멈칫하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성실을 바라봤다.


“괜찮아, 나도 몸이 하루가 다른 거 같아. 병원에서도 쉬라고 하고…….”


“가끔 바람도 쐬고 그래, 집에만 있으면 곰팡이 슬어.”


보경을 포함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성실에게서 멀어져 갔다.

버스에서 내려 힘없이 걸음을 옮기던 성실은 후미진 길 끝에 서 있는 목련빌라 앞에 섰다. 방 하나에 부엌 겸 거실이 있는 손바닥만 한 집이지만 성실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깜깜한 집에 들어가는 게 싫은 성실은 식탁 등을 켜둔 채 출근을 했다.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는 은은한 불빛을 보면 마음이 덜 쓸쓸해졌다. 그런데 오늘은 방 창과 거실 창의 불이 환했다. 잠시 멈춰서 생각에 잠긴 성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현관문을 여니 예상대로 커다란 한백수의 신발이 먼저 보였다. 식탁은 먹다 남은 소주병과 편의점 일회용 도시락이 지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성실이 성큼성큼 발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백수가 코를 골며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덩치가 큰 백수가 누우니 성실의 작은 침대가 더 작아 보였다.


“일어나, 빨리! 일어나라고!”

성실의 성화에 겨우 잠에서 깬 백수는 오랜만에 만난 성실을 보고 배시시 웃었다.


“비밀번호 어떻게 알았어?”


“엄마 생일.”


백수의 거침없는 답변에 성실은 말문이 막혔다.


“빌려 간 돈 갚기 전에는 얼씬도 하지 말랬지?”


“하나밖에 없는 오빠한테 말하는 것 좀 봐라. 저녁은 먹었어? 뭐 맛있는 거 사줄까?”


나 피곤해, 얼른 가.”


“성실아. 이번엔 진짜야. 내가 진짜 이번엔 제대로……. 딱 2천만 대출 좀 받아줘.


“이제 완전히 미쳤구나.”


“내가 나 혼자 잘 살려고 이러냐? 내가 잘돼야 너랑 미국에 있는 엄마랑 같이 합칠 거 아냐. 미국이 어디 옆집 개 이름도 아니고, 고생하는 엄마 모시고 번듯한 집 구해서 진짜 가족처럼 한번 살아보자. 내가 너 미국에서 대학도 보내줄게.”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었다. 가족이 함께 사는 게 매번 이런 난리를 치르면서 나눠야 할 얘긴지 성실은 절망했다. 왜 다른 꿈을 꾸며 살 수는 없는 건지, 남들의 평범한 일상이 그녀에게는 왜 이리 힘든 희망이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번에 대출받아서 준거 작년까지 꼬박 3년을 갚았어. 근데 또? 뭐 엄마랑 살 집?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백수가 벌떡 일어났다.


“에잇 썅, 인생이 내 뜻대로 되냐고? 세 배로 불려준다고 돈 가져가서 내뺀 그놈이 나쁜 놈이지. 그게 어디 내 잘못이냐고.”


백수가 성실의 책상으로 가더니 방송통신대학교 교재를 집어 들었다. 그가 교재를 펼치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책장을 넘기자 성실이 백수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뭐야? 영문과? 왜, 영어 배워서 어디다 쓸라고? 미국에 있는 엄마한테 관심 없다면서……”


“제발, 그만 가.”

“성실아, 너랑 나랑 보육원에 살 때 이 오빠가 너한테 어떡했는데? 벌써 잊었어?”


백수의 목소리가 가라앉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성실도 기억했다. 보육원 생활이 어땠는지,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던 성실에게 오빠는 유일하게 기댈 가족이었다. 일찍 술병으로 죽은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도 안 났다. 꼭 돈 벌어서 데리러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엄마에게는 편지 한 통 받은 게 전부였다. 그 편지 속에서도 곧 데리러 오겠다는 엄마의 약속은 여전했다. 브라이언이라는 성이 다른 동생이 생겼고 엄마는 미국 생활이 힘들다고 썼지만 잘 적응하고 사는 듯이 보였다. 자식만 생각하며 살고 있을 거로 믿었던 엄마의 재혼이 어린 성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 성실에게 오빠는 곧 엄마였다. 성실이 보육원 아이들에게 미국에 사는 엄마 자랑을 하며 허세를 부린 덕에 아이들은 심심하면 성실을 ‘아메리카노’라고 놀려댔다. 그럴 때마다 성실의 눈물을 닦아주고 놀리는 아이들을 쫓아가 혼내준 게 오빠였다.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성실이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면 백수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반찬을 성실의 식판에 올려주었다.


“우리 엄마 미국에서 부자야. 아주 큰 집에 살아. 개도 두 마리나 키우고. 내 동생도 있어. 이름은 브라이언이야, 머리카락은 곱슬이고……, 나처럼 검은색이야.”


“거짓말쟁이, 아메리카노! 아메리카노!”


어릴 때 보육원에서의 일들이 성실의 기억에서 다시 살아났다. 어제 일처럼 또렷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백수가 성실의 손을 잡고 애원하는 소리에 성실은 다시 비좁고 누추한 자신의 방에서 다시 어른이 된 백수와 마주했다.


“성실아. 마지막으로 나, 한 번만 더 믿어 봐.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진짜!”


“날 좀 제발 가만 내버려 둬, 제발!”


백수의 표정이 다시 어둡게 변했다. 방 밖으로 나간 백수는 외마디 고함을 치며 식탁에 있는 것들을 손으로 쓸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술병이 깨지고 약봉지에 있던 약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성실이 겁에 질려 백수를 바라보았다.


“진짜, 성질 건들래? 은행 가서 서류 몇 장 쓰면 될 일을 가지고. 나 좀 나쁜 사람 만들지 말라고. 나중에 다시 올 테니 그때 다시 얘기하자. 이번 건 놓치면 미국에 가서 엄마 만나는 것도 다 물 건너가는 거야. 그러면 다 너 때문이야.”


백수는 바닥에 있는 성실의 가방을 열어서 뒤지더니 지갑을 꺼내 현금을 빼서 자기 바지 주머니에 넣은 후 현관문을 부서질 듯 닫고 사라졌다. 성실은 바닥에 널브러진 약봉지를 주워 담고 깨진 유리 조각을 줍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흘렀다. 식탁 의자에 앉아 다친 손가락을 빨던 성실은 울음을 터뜨렸다. 보육원에서 울었을 때는 옆에 백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혼자였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3화3화. 정숙과 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