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고사직...그 우울한 30대의 초상

30대 젊은 나이에 회사에서 내쳐지다

by 강나루

2000년으로 기억한다. 나는 ㅇㅇ조선소에서 ㅇㅇ중공업 XX공장 조립부로 발령이 났다. ㅇㅇ조선소에 입사하였지만 ㅇㅇ그룹에서 ㅇㅇ조선소를 구조조정하면서 1999년경 ㅇㅇ조선소를 ㅇㅇ중공업 XX공장으로 흡수 합병하였다.


2000년 ㅇㅇ중공업 XX공장으로 발령이 난 곳은 이전에 근무하던 곳과 공간도 근무하는 사람들도 달라, 회사에 적응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같은 계열사지만 회사 직원들은 모르는 사람이어서 입사 6년 차이지만 신입사원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더구나 ㅇㅇ조선소에서 도장팀에서 근무하다가 조립부에서 근무하게 되니 모르는 것도 많아 새로 일을 배우느라 힘이 들었다.


2000년 2월 결혼하고 ㅇㅇ시 사원아파트에 신혼집을 차렸지만, 회사가 다른 지역이라 나는 10월 발령이후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했다. 아내는 임신 중이어서 내가 보호해야 했는데 떨어져 있으니 되도록 이면 빨리 아내와 합가해서 살려고 애썼다. ㅇㅇ중공업 XX공장으로 발령 몇 달 후 우리는 XX시 사원아파트로 이사를 하였다.


조립과 과장(그 당시에는 조직 명칭 개편으로 ‘팀’을 ‘과’로 불렀다.)은 젊은 사람이었고 목표와 성과를 위해 부하직원을 매우 다그치는 인물이었다. 팀원들은 팀장의 강압적,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부서 이동을 요청하는 직원도 있었다.


나도 갈굼을 당하는 사람 중 한 사람었는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IMF 여파가 남아있는 시기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과장이 사는 곳은 xx시, 같은 지역의 사원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통근버스를 같이 타기 때문에 퇴근 시에도 마주치는 일이 잦았고, 그와 원치 않는 술자리를 가지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는 자기 목표를 위해 부하직원을 조종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남의 부서 아이디어를 빼앗아 내가 한 것처럼 하는 파렴치한 행동도 하는 매우 성과지향적 인물이었다. 과제를 내어서 원하는 답이 안나오면 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책상을 두드리며 욕을 하는 사람이었다. 사무실은 그렇게 살벌한 현장이었다. 또한 공정회의와 같은 책임 있는 자리에 권한이 없는 나를 참석시켜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 하게 했으며, 쏟아지는 타 부서의 공정독촉, 불만, 고함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도록 했다. 나중에는 회의에서 했던 나의 발언을 문제 삼아 호통을 치곤 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옥 같은 직장생활을 버텨내고 있던 어느 날 아내에게 "직장을 옮기면 어떨까?" 하고 어렵게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그때 아내는 지금 다들 힘든 시기라고 조그만 참아 보자고 했다.


2000년경 계열사 회장이 ㅇㅇㅇ에서 xxx로 경영권 변경이 있었고 임원진이 다수 교체 되었다.

그날은 아침 7 조립장 야드 순찰을 하고 조립팀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핸드폰으로 조립부장에게 전화가 와서는 할 말이 있으니 사무실에서 만나자고 했다.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이미 김과장이 있었다. 조립부장은 뭔가 어려운 말이 있는 것처럼 뜸을 들이더니 나와 김 과장에게 '권고사직' 대상이라고 말을 하였다.


나는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권고사직 살생부 명단'을 받은 사람이 누구인지 회사에 소문이 쫙 퍼졌다. 사무실이 앉아있는 것이 가시방석이었다. 독종이었던 팀장은 막상 내가 명단을 받자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부하직원이라기보다는 다른 회사 직원 대하듯 예우하였다.


권고사직 관련 법령을 찾아봤고, 왜 내가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아내에게는 이야기를 했지만 차마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하였다.


권고사직 대상이 된 사람은 대부분 출근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출근 투쟁을 하였다. 출근을 계속하자 회사에서 나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매일 출근하여 7 조립장 현장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하루는 뉴스에 탤런트 박정수와 가수 유열의 열애기사가 실렸는데 박정수가 열애설을 강하게 부인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현장사무실 컴퓨터를 이용하여 그 사건을 비유하여 한진중공업 권고사직 보도(언론에는 한진중공업 권고사직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미화되어 보도가 되었다)를 비판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감사실에서 그 사실을 알고 난리가 났다. 그날 'SNS 게시글' 사건 이후 상급부서에서 내 책상을 조립팀 사무실로 옮기라고 명령 하였다.


며칠 후 조립부장이 나에게 저녁식사를 제안하였다. 식사장소가 중화요리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날 조립부장은 의도적으로 나에게 술을 많이 권하였다. 그날 나는 인사불성으로 만취하였고 조립부장이 나를 부축하여 우리 집으로 들어 왔다. 조립부장은 집에 계시던 어머니 앞에서 ”어머니 제 목을 치십시오!”라는 눈물쇼를 하였고, 그 날 내가 권고사직 당한 사실을 우리 어머니가 알게 하였다.


어머니에게 알려지니, 안쓰러워하는 가족들을 보기가 여려워 출근 투쟁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인사과에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인사과 직원 중 ㅇㅇ공장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임직원이 어떤 회사에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지만, 나중에 알아 보니 그 말은 그냥 '립서비스'였다.


며칠 후부터 아내에게 '구직 활동자금'이 필요하다고 용돈을 받아서 일자리를 구한다는 핑계로 거제에 갔다. ㅇㅇ중공업에 근무하던 대학교 동문을 찾아가서 저녁에 술을 마셨다. 그 날 저녁 돌아오는 길에 자꾸 눈물이 났다. 울적한 마음에 혼자 노래방에 갔다. 혼자서 락 발라드를 목을 놓아 불렀다.


며칠후 예전 근무했던 ㅇㅇ조선소 ㅇㅇ공장에 갔다. 아직 XX공장으로 전근하지 않고 있던 설계부 동료들과 예전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현장 노동자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받기를 원했지만 '나는 살아남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돌아오는 길이 씁쓸하였다.

S중공업 경력사원 모집이 있어서 지원을 하였고 면접을 보라오라는 연락이 와서 찾아갔다.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많이 지원하였고 경쟁률도 심했다. 면접관이 나에게 ㅇㅇ중공업을 사직한 이유를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얘기했고 그 질문으로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결국 눈높이를 낮추어 중소기업으로 지원을 했다. 그 회사는 이미 ㅇㅇ중공업에서 나와 같이 그만둔 사람이 2명 근무하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입사하였는데, 두 사람은 ㅇㅇ중공업에서 고졸 출신이면서 사무직 근무자였다. 그 회사는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고, 특히 임원진과 외주업체의 유착이 심했다. 그 회사는 외주업체가 갑의 위치에 있었다. 관리자는 외주업체의 ‘보조자’ 정도로 취급받았다. ㅇㅇ에서 부산까지 출근하는데 자가용으로 출근해야만 했고, 임원진은 일 없이 놀고먹는 ‘월급루팡’이었고, 사장은 근무 중 낚시나 하러 다니는 '놈팽이'이자 '한량'이었다.


근무하면서 다른 일자리를 찾아 보았고, 공공기관에 시험을 응시하여 합격을 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근무를 하고 있다.


ㅇㅇ중공업을 그만둔 후 죽을 만큼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회사에 충성을 다했는데 배신을 당했다는 감정 때문이었다.


ㅇㅇ중공업 조립부에서 근무할 때 어느 늦은 저녁시간에 선체 블록이 전복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고 현장에 뛰어가 위험을 무릅쓰고 고정 새클을 채웠던 일


여름날 철야 '돌관근무' 노동자를 감시, 감독하기 위해 현장사무실에서 모기에 뜯기며 노숙을 하던 일


ㅇㅇ 사원아파트에서 새벽 6시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 저녁 7시 40분 퇴근버스를 타던 일

저녁 회식이 있는 날, 남포동 만 원 총알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새벽 통근버스를 타던 일


그렇게 힘들게 버텨왔는데 권고사직을 당하니 내 마음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이용만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이야기는 지금 50대 후반이 될 때까지 가족 외에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하는 비밀 같은 것이었는데, 글을 쓰니 마음이 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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