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의 여유를 낚아챈 ‘송어’

프란츠 슈베르트-피아노 5중주 가장조 D.667 ‘송어’ 4악장

by 강펜치

산더미처럼 쌓였던 설거지를 마침내 해치웠다. 쑤시던 허리를 곧게 폈다. 이제는 커피 타임. 원두를 곱게 갈아 드리퍼에 몇 스푼 담았다. 그 위로 뜨거운 물을 천천히 부었다. 김을 타고 올라오는 진한 커피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완성된 커피를 머그에 담아 손에 쥔 채 소파에 몸을 맡겼다. 진한 풍미의 커피 몇 방울이 입술에 닿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슈베르트의 <송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이 곡은 가곡과 피아노 5중주(4악장)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주말 오후에 딱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활기찬 선율은 커피의 쌉쌀한 맛과 향을 한층 더 돋워줄 것만 같았다. 기품 있는 피아노와 현악기의 조합으로 감상하거나 아름다운 노래로 들었다면 그랬을 테다. 그러나 지금 이 음악은 우리 집 세탁기가 연주하는 것이다. 세탁기는 빨래가 끝날 때마다 <송어>를 흥얼거린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시다 말고 벌떡 일어나 세탁기로 달려갔다. 강물 위로 팔딱이며 뛰어오르는 송어 대신, 탈수돼 쭈글쭈글해진 세탁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에도 약간 두려운 마음으로 세탁기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서로 뒤엉킨 흰 세탁물 사이에 검은 옷이 섞여 있다면 그야말로 낭패다.

아내는 빨래에 진심이다. 소중한 옷은 늘 손빨래를 한다. 흰옷과 색깔 있는 옷을 분리하지 않고 뒤섞어 세탁기를 돌렸다가 아내에게 혼쭐이 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늘 주의하지만, 섞여서는 안 될 옷이 꼭 한두 개쯤은 따라 들어간다. 세탁기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태연하게 <송어>를 완창 했다.

가곡으로 불리는 <송어>는 가사가 4절까지 이어진다. 4절의 가사를 곱씹어 보면, 이 노래는 생각보다 잔인하다.


하지만 결국 그 낚시꾼은
기다림을 지겨워했다네.
그는 개울을 휘저어
흙탕물로 만들었다네.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낚싯대가 휘어져있었네.
거기에 송어가 꿈틀대고 있었네.


이 노래의 시인은 처음에 송어가 물속에서 여유롭게 헤엄치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러다 낚시꾼에게 붙잡혀 버리는 비극을 생동감 있게 묘사한다. 송어는 결국 자유를 박탈당한 채 낚시꾼의 밥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 노래를 만든 슈베르트의 삶 또한 이 송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는 음악으로는 누구보다 자유롭게 노래했지만, 현실에서는 늘 가난과 생계에 붙잡혀 있었다. 정해진 직업 없이 친구 집을 전전하며 작곡했다. 수많은 곡을 써냈지만 그 대가를 온전히 누리지는 못했다. 젊은 시절에 쓴 <송어> 역시 그런 삶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곡이다.


이런 슈베르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의 곡 <송어>는 나에게 가사 노동의 신호음처럼 굳어졌다. 마치 베토벤의 피아노 작품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으면 자동차 후진 경고음과 매캐한 매연이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이날은 더욱이 커피 마시는 여유마저 빼앗겼다. 기다림을 지겨워한 낚시꾼처럼, 집안일은 개울을 휘저으며 나를 끌어냈다. 이 가사노동이 낚시꾼이라면, 그날의 나는 물 밖으로 끌려 나온 송어였던 셈이다.




그나마 빨래는 세탁기가 대신 해주니 다행이긴 했다. 만약 이 많은 빨래마저 내 손으로 해야 했다면 커피 생각조차 못했으리라. 곰곰이 따지고 보면 한국 가정에 세탁기가 보편적으로 보급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유년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 때만 해도 그랬다.


내가 초등학교 1~2학년 때만 하더라도 우리 집에는 세탁기가 없었다.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욕실에서 빨래하시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머니는 큰 대야에 빨래판을 걸치고 뽀얀 거품을 내며 빨랫감을 문지르셨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고된 작업으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나중에 돈 벌면 세탁기 사줄게"라고 말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피식 웃으셨다.


한 언론 보도에는 1990년대부터 한국의 세탁기 보급 속도가 빨라졌다고 한다. 그즈음에 우리 집도 세탁기를 들여놨다. 역시 S사의 제품이었고, 세탁과 탈수가 분리된 구조였다. 어머니는 탈수기가 돌아갈 때는 뚜껑을 절대 열지 말라고 내게 거듭 경고했다. 혹시라도 내가 돌아가는 기계 속으로 팔을 들이밀까 걱정해서였다. 어머니에게 세탁기를 사주겠다고 큰소리치던 효자는, 어느새 탈수기 뚜껑을 슬쩍 열어 빙글빙글 도는 탈수통을 들여다보는 불효자가 되고 말았다.


물론 세탁기가 들어왔다고 해서 어머니가 가사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식사 준비에 나와 여동생 도시락 싸기, 집안 청소 등. 주부였던 어머니의 하루에는 늘 다른 일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집안일 참여를 기대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힘들게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사 노동에서 면죄부를 얻었다.


내 기억 속 우리 아버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친구들 아버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가끔 또래들과 모여 “우리 아버지 세대가 제일 부럽다”라고 말하면, 모두가 씁쓸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물론 지금은 누구도 우리들 아버지처럼 행동할 간 큰 친구는 없다. 아내와 법정을 구경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세탁기가 어머니의 고단함을 적지 않게 덜어준 것은 분명했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허리를 깊이 굽혀 빨래판을 박박 문지르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하준은 그의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인류 최대의 발명품이 인터넷이 아닌 세탁기라고 주장했다.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이 집안일을 줄여 여성의 사회 진출을 촉진했다는 내용이다. 그 책을 읽을 때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다만 정말 그런지는 우리 어머니를 비롯해 여성들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이제 불평은 접어두기로 한다. 대신 묵묵히 빨래를 맡아준 이 위대한 인류의 발명품에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어서 빨래를 널고, 식어버린 커피를 마저 마셔야겠다. 티셔츠를 탈탈 털다가 매일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생활비를 벌어오는 아내를 생각했다. 그래, 이 정도 가사 노동쯤은 내가 기꺼이 맡아야 할 몫이다.


그러고 보니 세탁기도 있는 마당에 식기세척기까지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식기 세척이 끝났을 때 슈베르트의 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가 흘러나오는 기계라면 더욱 좋겠다. 물방앗간의 아가씨라면, 설거지쯤은 제법 능숙하게 해낼 것 같아서다.


https://www.youtube.com/watch?v=VKQQH5Och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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